시간 지키기[한강우칼럼]

기사입력 : 2017년 03월 17일

캄보디아의 한 방송사 사장을 만나기로 했다. 내 일을 돕고 있는 캄보디아 친구가 방송사 사장과 친분이 있다고 해서 그에게 면담 주선을 부탁했다. 약속 시간 30분 전, 나를 안내해서 출발하기로 한 시간이 지났는데 그 친구가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를 했더니 지금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약속을 요청한 사람으로서 조바심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약속 장소까지는 자동차로 20분 정도 거리, 안내자가 늦게 오는 바람에 약속 시간 5분 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그날따라 길까지 막혀서 약속 시간에서 15분이 지난 뒤에 겨우 방송사에 도착했다. 여기에 사무실 찾는 데 10여 분, 결국 약속 시간을 30여 분 지나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처음 만남에 시간을 못 지킨 것에 대하여 사과를 했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한 캄보디아 학생이 취직 부탁을 해 왔다. 마침 직원을 찾는 한국분이 있어서 면담 시간을 잡아 주었다. 그런데 면담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학생이 나타나지 않았다. 면담을 하기 위해서 찾아온 한국 손님에게 사과를 한 다음 다시 약속을 하기로 하고 돌려보냈다. 30여 분이 지난 다음에 나타난 학생을 붙잡아 놓고 교육(?)에 들어갔다. 약속 시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하여. 가끔 캄보디아 학생들을 모아놓고 특강을 하면서 시간을 지키는 문제에 대하여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를 하지만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다. 수업 시작 시간에 맞춰서 교실에 들어오는 학생은 반수 정도, 반수 정도는 늘 늦게 들어온다. 늦게 오는 이유를 물어보면 길이 막혔느니 오토바이가 고장났느니 이런 저런 대답을 하지만 근본적이 이유는 그들의 의식에 있음을 어찌 모르랴.

캄보디아 사람들하고 시간 약속을 하면 상당한 인내력이 필요하다. 제 시간에 나오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자신이 필요해서 약속을 해 놓고도 늦는 경우가 다반사다. 2,30분 늦는 것은 보통이고 약속한 시간이 지나서야 못 나올 사정이 생겼다고 전화를 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약속 시간에 늦었다고 해서 별로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왜 늦었냐고 물으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기도 한다. 시간에 대한 관념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을 이해하면 속이 좀 편하다.

자본과 기술과 시간은 산업사회의 핵심 요소다. 산업사회의 노동 생산성은 시간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에 생산 현장에서는 항상 시간과의 싸움이 수반된다. 제조업이나 서비스 분야가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캄보디아는 아직 농경사회의 뿌리가 굳건히 박혀 있는 나라다. 자연의 순환에 따른 시간관념이 캄보디아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시간이 곧 돈’이 되는 세상과는 거리가 멀다. 서둘러 봤자 나에게 돌아오는 이득이 별로 없다. 이러한 의식은 단지 시간 약속 지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업무를 정해진 시간 안에 처리하지 못하거나, 보다 창의적 방법을 찾으려는 의지가 부족하거나,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기피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대충대충 편하게 사는 생활방식이 몸에 밴다.

‘코리언 타임’이라는 말이 있었다. 시간을 안 지키는 한국인을 지칭하는 말로, 40여 년 전까지 서양인에 비춰졌던 한국인상이다. 과거의 그런 나 자신을 지금 캄보디아에서 보면서 산다. 질질 끄는 일 처리에 답답해하고 약속 시간 안 키는 데에 화를 내는 것은, 올챙잇적 시절 모르는 개구리와 뭐가 다르랴. 이들이 시간을 알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시간을 가지고 기다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