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칼럼] 도시의 빈곤

기사입력 : 2013년 03월 19일

마트로시카

차창 밖으로 장례행렬이 지나간다. 가슴을 찢는 곡성은 없으나 거창한 운구차 뒤로 따르는 이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행세깨나 했던 인사였나 보다. 지상의 욕망덩어리 하나가 비로소 만족을 모르는 자맥질을 다스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장례행렬이 무색하게 시내는 활기에 넘친다. 힘겹게 자전거 바퀴를 굴리는 사람의 시선은 곡예 하듯 달아나는 오토바이 꽁무니를 따라간다. 땡볕에 헬멧을 뒤집어쓴 오토바이족은 느긋하게 운전대를 굴리는 자가용족을 흘끗거린다. 신호를 기다리는 오너드라이버는 건너편 번쩍이는 신형외제차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열대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은 태양을 즐기는 구미 관광객들뿐이다.

가난이란 상대적인 것이어서 자신보다 한 단계 높은 사람이 가장 부러운 법이다. 큰 것을 열면 작은 것이 나오고, 작은 것을 열면 더 작은 것이 나오는 러시아의 “마트료시카”인형처럼, 시들해진 욕망은 더 큰 욕망에 자리를 내주고 그것도 잠시 마음은 다시금 깊은 우물처럼 공허(空虛)해질 터이다. 프놈펜의 붐비는 거리마다 소비심리를 자극하는 물자와 당당한(?) 표정의 거지들로 넘쳐난다. 찰스 렘은 그의 수필에서 세상의 흥망성쇠 따위에 상관할 바 없는 하늘 아래 단 하나의 존재는 거지뿐이라고 피력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그들만이 욕망의 사슬로부터 해방된 계층이라며 거지를 예찬했다. 최악의 경우라도 동냥 상대를 바꿔치기 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도시인 치고 남보다 나은 처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흔치않다. 두툼한 부동산 문서를 껴안고 달랑달랑한 은행잔고를 헤아리는 사람들, 이해관계의 거대한 쳇바퀴에 엮여 한 달 한 달 굴러가는 사람들, 화려하게 치장하고 하루살이 같은 생계를 위해 은성한 네온사인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 대중 틈에 섞여 유쾌한 듯 살고 있지만, 하나같이 상대적 궁핍을 감추느라 근심에 젖어 있다.

프놈펜 상공을 관통하는 태양, 바야흐로 폭염의 계절이다. 어느덧 그림자는 주인의 보잘것없는 이력마냥 짧아졌다.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전형적인 캄보디아 풍경은 여전하다. 그늘과 의지할만한 수직재만 있으면 해먹을 치는 사람들, 그들은 자진하여 그물에 걸려들고 근육이라곤 없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부산스레 움직이는 이방인을 응시한다. 부처님이나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라면, 두 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필요 없는 무소유의 삶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으리라. 고대 현자들은 한 목소리로 욕망의 종착지는 안달과 속상함뿐, 그것들을 쫒기엔 현세의 삶이 너무 짧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시샘하면서 동시에 현명해지기란 불가능한 일, 삶이 우리같이 어리석은 사람을 호락호락 놓아 줄 리 만무하다. 언제부터 가난이 부끄러운 일이 되었던가.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한 번도 꿈을 위해 위험을 무릅써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아니런가./ 나순 (건축사, http://blog.naver.com/naarch)

댓글 남기기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