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더 알아보기] 제43화 크메르제국 최후의 전성기, 자야바르만7세왕

기사입력 : 2020년 06월 26일

수정됨_43-03▲ 바이욘사원

씨엠립 앙코르톰의 중심에 있는 바이욘사원(Bayon Temple)에는 웅장한 얼굴이 사면에 조각된 탑 수십여 채가 밀집해 있다. 얼굴은 자야바르만7세왕의 용안일 수도 있고 대승불교의 부처상일 수도 있는데, 많은 관광객들이 여기에서 원거리의 용안과 어우러진 ‘인생샷’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혹시 앙코르와트사원에서 힌두교 신화에 심취해 신계를 떠돌았다면, 앙코르톰에서 시원한 사탕수수 음료를 들이키며 들어서는 바이욘사원은 자애로운 미소를 전하는 사면상과 함께 서민적인 삶이 드러나는 부조에서 인간미 넘치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자야바르만7세는 1181-1218년에 재위해서 크메르제국 최후의 전성기를 통치했던 왕으로, 1122년에 다라닌드라바르만2세왕과 자야라자쭈다마니왕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야라자떼위 공주와 결혼했지만 사별하고 그녀의 동생 인드라떼위 공주와 재혼했다. 두 명의 왕비는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는데, 특히 최초로 왕을 불교에 귀의해서 국교로 선정하도록 이끌었다. 그 결과로 건립된 대표적인 불교 기념물 바이욘사원은 훗날 역사가들로부터 가장 강력한 크메르 군주로 평가되는 그의 위용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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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왕이 되기 전인 1177년에 베트남 중부의 참파왕국(Kingdo of Champa; 192-1832) 해군이 메콩강 상류와 프놈펜에서 똔레삽 호수를 지나 씨엠립의 앙코르지역까지 침공해 왔다. 이 과정에서 수도 야소다라푸라는 약탈과 파괴로 초토화되고 당시 크메르제국의 왕도 죽었다. 이에 1178년, 50대 중반이었던 자야바르만7세가 군대를 이끌고 출정함으로써 침략자를 쫓아내고 해전을 승리함에 따라 역사적 명성을 얻었다. 이때의 해상전투 장면은 바이욘사원과 반띠츠마사원의 부조에 잘 묘사되어 있다.

수정됨_43-04▲ 1191년에 부친의 자비심을 전하기 위해 왕국의 전역에 하사한 석상으로서 자야바르만7세왕 자신의 모습이다.

전쟁에서 돌아온 자야바르만7세는 수도의 무질서를 수습하고 내분을 조장하는 파벌 간의 분쟁을 종식시키고 나서 1181년에 공식적으로 왕위에 등극했다. 통치 초기에도 참파왕국의 공격을 격퇴했고, 속국이던 바탐방 지역의 말양왕국에서 벌어진 반란을 진압했다. 또한 한때 참파왕국에서 크메르제국 침탈에 참가했다가 캄보디아로 망명한 수리야바르만 왕자의 전술 덕분에 많은 전쟁을 승리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자야바르만7세왕은 북쪽으로는 메콩계곡의 비엔티안까지, 남쪽으로는 태국운하까지 크메르제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자야바르만7세왕은 37년의 통치기간 동안 공공시설과 종교적 기념물 등과 같은 대규모 건설을 추진했다. 마하야나(Mahayana; 대승불교) 불교인으로서, 그의 목표는 백성들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전하는 비문에서도 “왕께서는 자신보다 백성들의 질병으로 아파하셨다. 사람들의 육체적인 고통을 보시고 그는 정신적으로 사무치게 괴로워하셨다.”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대규모 토목공사에 수많은 노동력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인구를 수도로 결집시키고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루는 요인이 되었다.

수정됨_43-06▲ 쁘레아칸사원 근처의 인공호수에 섬처럼 조성한 ‘니억뽀안사원’

역사학자들은 자야바르만7세의 건축물을 세 유형으로 분류한다. 먼저 공공의 실용성을 위해서 병원 102채, 휴게숙박시설 127채, 다수의 저수지를 개발했다. 다음으로 부모의 명복을 기원하고자 어머니를 위해서 ‘따프롬사원’(1186년)과 아버지를 위해서 ‘쁘레아칸사원’(1192년)을 건립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위해서 216개의 사면상이 있는 바이욘사원을 건축하고 그 주변으로 최대 면적(앙코르와트사원(30만㎡)의 5배)의 신도시 앙코르톰을 조성했다. 또한 쁘레아칸사원 근처의 인공호수에 섬처럼 조성한 ‘니억뽀안사원’도 작지만 보석처럼 아름답다.

오늘날의 앙코르톰과 바이욘사원은 불교와 힌두교 양식이 공존한다. 자야바르만7세왕 사후 1243년 자야바르만8세왕이 국교를 힌두교로 전향하면서 앙코르톰과 바이욘사원의 불교적인 부조와 사면상을 훼손하고 힌두교 양식을 덧입혔기 때문이다. 한편 사원의 외벽 부조는 크메르 군대의 해전 장면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소소한 일상, 이를테면 소달구지를 끄는 사람, 사냥꾼, 중국인 무역상과 흥정하는 여성, 즐겁게 노닥거리는 병사 등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왕립프놈펜대학교 한국어학과 이영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