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칼럼] 수학귀신

기사입력 : 2017년 10월 26일

<행복 =소유/욕망> 벤자민 프랭클린이 제시한 행복수식이다.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분모(욕망)를 줄이거나 분자(소유)를 늘리거나 하면 된다는 것이다. 욕망에 대한 조절이 자유로운 탓인지 철학자들은 더 많은 행복을 누린다고 한다. 부처님의 경우는 분모 분자를 제로상태로 만들어버림으로써 해탈의 경지까지 이르렀다고 할까. 좀체 허영심을 버리지 못하는 나로서는 분모와 분자를 동시에 늘릴 궁리에 허덕이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일 터이다. “성공 =재능+노력+운”, “운>노력>재주>”라는 성공수식도 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재능과 노력, 운이 따라야 하고, 이 셋 가운데 재주보다 센 것이 노력이고 노력보다 센 것이 운이라는 것이다. 운이란 바람둥이와 같아서 한 연인에게 오래 머무는 법이 없다니 스파크가 튀는 순간 낚아챌 줄 알아야할 텐데… 아무튼, “하루에 사랑에 대해 몇 번이나 생각하십니까?” 유의 설문을 토대로 로맨틱지수를 산출한다든지, 건강, 만족도, 경제력 따위의 평가를 종합해 행복지수를 매기는 등 인문분야까지 수치화하는 추세는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혹자는 인문학의 수학적 해석은 21세기 최대 과업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인류의 필요에 의해 창출된 문명은 수리(數理)의 총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라미드, 타지마할, 금문교, 런던지하철 등이 무수한 수치 규정에 의한 산물이다. 인터넷 쇼핑, 온라인 결재, 게임, 오락 등 현대문명의 첨병인 컴퓨터 프로그램 또한 이진법 계산에 의한 0과 1의 향연이 아니던가. 투표율, 시청률은 물론 남녀 잠자리 횟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동이 확률의 데이터로 잡히는 현대인을 일컬어 걸어 다니는 숫자라고도 한다. 각종 사회현상에 대한 통계를 통해 어떤 집단이 수학적 패턴을 더 빨리 찾아내느냐가 속도경쟁사회에서 성공의 관건이 되기도 한다. 대중 행동의 지표들이 미래사회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여주기도 하고, 소비문화의 향방에 대한 추론은 곧바로 수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세계 국력의 순위와 수학 실력의 순위가 일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터이다.

언젠가 남태평양의 미국령 섬 피지에 휴양시설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다. 그곳으로 이주해 활동하는 나이 지긋한 구미 건축가가 있었다. 일 년에 소박한 주택 한 채 정도 맡아 지으면서 어여쁘고 나긋나긋한 현지여인과 함께 타이티의 고갱처럼 살고 있었다. 같은 건축쟁이로서 부러웠던지 남편도 노후를 그렇게 보냈으면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논리보다 정령을 더 믿는 캄보디아에서 건축업으로는 낭만적인 노후를 기대하기 힘들 듯하다(마누라 또한 적절한 타이밍에 사라져 준다는 보장이 없고). 건축설계도란 숫자와 그림으로 작성되는 만국공통어지만 작금의 캄보디아 수학교육 수준으론 여의치 않은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캄보디아도 세계시장의 어엿한 일원이다. 미국 발 금융대란이 세계시장을 뒤흔들었듯 현대적 의미의 시장은 수학이 마술을 부리는 곳이다. 다른 정령만 섬기지 말고 이제는 수학귀신도 섬겼으면 좋겠다./나순(건축사, UDD건설 naarc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