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칼럼] 전문가

기사입력 : 2017년 08월 09일

와이드 스크린도 있고, 에어컨도 있고, 침대까지 배달되는 음식도 있고, 성희롱을 해도 고발은커녕 못내 아쉬워하는 상대까지 있는데, 그곳에 나만 없다. 그곳은 다름 아닌 자신의 집이다. 평생 바라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도 그 집에 내가 없기 일쑤다. 혹자는 일에 치어 시간이 없어서, 혹자는 역시 공짜란 그렇지 뭐 마음이 없어서. 요즘은 독신가구가 증가해 짝 대신 고양이가 지키는 집이 많다. 싱글족이 느는 원인 중 연애의지 상실이 한몫하지 않을까싶다. 한 세대 전만해도 연인의 집 앞에서 종일 죽치는 건 예사요 연서를 돌에 말아 창문을 향해 던지는 일 또한 드물지 않았다. 현행법에 의하면 스토킹으로 범죄행위에 해당한다. 나와 사귀기를 원하는가?, 이쯤에서 손목은 잡을 수 있나?, 언제나 입맞춤이 가능할까?, 누군가 중재해주지 않는 한 자칫 합법적인 연애범주를 벗어나기 십상이다. 안전하게 연애를 하거나 바람을 피우려 해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초혼, 재혼, 국제결혼 등, 결혼 전문가의 등장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대행업이나 컨설팅이 흔하디흔한 비즈니스가 된 건 그만큼 세상이 복잡해졌다는 증거이리라. 전문가의 조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현대의 독신생활이 건축의 발전 때문에 가능해졌다는 사실은 종종 간과된다. 마천루의 수많은 창 중 하나의 유니트 안에서 뉴스를 보고, 인터넷을 하고, 먹고, 배설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물이 지어진 후에야 구매하거나 임대하기 때문에 건축사의 역할에 대해 잘 모르지만, 건축물의 설계는 건축사 고유 영역이다. 나라마다 운영을 달리하지만 국가 전문자격시스템은 비슷하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를 좋아해 선천적으로 전문가 타입이 아니지만, 건축문외한은 알아볼 수 있다. 다짜고짜 기둥을 키워라, 철근을 더 넣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전문가란 계산과 통계를 근거로 적정한 규모를 산출해냄으로써 비용과 시간을 절감해주는 사람이다. 같은 두께의 철선이라도 여러 가닥으로 나누어 꼬면 인장력이 놀랍도록 증가한다는 논리를 증명하는 데 수십 년씩 투자하는 것이다.

전통적 의미의 전문가들이 체제 부역자로 전락하곤 한다. 평화의 댐이나 사대강 사업을 지지해 혈세를 특권층에 몰아주는 역할 따위를 해대는 걸 보면. 나이 탓인지 해외생활 탓인지, 언제부턴가 주변의 보통사람이 더 전문적으로 느껴진다. 언어와 풍토의 장벽을 넘어 자리를 잡은 분들 얘기엔 유일무이한 삶의 비경이 녹아있다. “전문가란 협소한 분야에서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실수를 빼놓지 않고 저질러 본 사람이다.”는 닐스 보어의 말처럼 산전수전 겪은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정보다. 특별한 행운아가 아니고는 비전문가로 남아있도록 내버려둘 정도로 녹록치 않은 게 또한 세상살이다. 그러니까 살아남은 기성세대 대부분이 ‘생존전문가인’ 셈이다. 서로 촘촘히 얽혀 돌아가는 서바이벌의 세계, 도시를 이루는 창문 하나하나의 불빛에 가끔 가슴 뭉클해지는 까닭이다. /나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