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칼럼] 포장술

기사입력 : 2017년 06월 02일

80년대만 해도 일반 사무실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일이 흔치 않았는데 설계사무실은 예외였다. 사람을 위한 측면도 있었지만 도면관리 문제가 컸다.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 각자 제도판 하나씩 꿰차고 수작업을 하던 시절로, 트레이싱페이퍼(tracing paper)에 도면을 그렸다.

청사진용 원도인 얇은 투사지로 물기가 배면 울어버리기 때문에 여름철엔 손이나 팔뚝에 땀이 차지 않게 냉방에 신경 써야 했던 것이다. 대형 제도판에 트레이싱지를 붙이고 반쯤은 서서 반쯤은 앉아서 티자와 삼각자, 스케일을 휘두르며 도면을 작성하는 일이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겸하는 작업이다. 남자들끼리 있을 때는 땀나는 것을 방지하기위해 하의실종으로 지내는 이들이 상당수였다는 얘기를 당시 홍일점으로 입사하고 나서 들었다. 제도판 위로는 문명인, 제도판 아래로는 원시인, 건축주 면담이나 윗선의 호출이 있을 때만 바지를 입고 나갔다나. 역시 예의나 품위는 남녀가 적절히 섞여있을 때 지켜지는 모양이다. 8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가 상용화되면서 컴퓨터 그래픽에 의한 설계도면이 시장을 점유해나가고 연필도면은 차츰 설자리를 잃었다.

제도판과 청사진기를 밀어내고 고가의 PC와 플로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발달과 함께 프레젠테이션 기법도 발전을 거듭했다. 평면적인 2차원 도면에서 공간 개념의 3차원 입체도면이 부가되고 실제 상황을 연출해 보이는 시뮬레이션기법까지 동원되었다. 공간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유용하지만 컴퓨터 환경에서 다루기 수월한 아이템들로 효과만 극대화함으로써 건축적인 본질을 왜곡하는 면도 적지 않다.

남보다 돋보이려면 이제 화장이나 쌍꺼풀 수술 정도로는 어림없고 보톡스 시술은 물론 얼굴윤곽 정리를 위해 뼈를 깎는 아픔까지 감수해야 하는 성형시장의 상황과 일맥상통한다고 할까. 본질을 위한 투자보다 포장을 위해 시간과 비용을 무한대로 투자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설계실의 야근은 여전하다. 수작업을 할 때는 건물을 규정하기 위한 매뉴얼용 도면작성이 야근의 주요인이었다면 지금은 거기에다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포장용 도면까지 더해진다. 어느 시대보다 휘황찬란해진 도시에서 사람들은 첨단기기를 다루고 있지만, 컴퓨터좌표를 쫒아 밤을 새는 것과 삯바느질로 밤을 새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기술의 발전이 더 많은 자유를 준다는 말은 실업을 의미한다면 모를까 노동시간의 단축과는 무관한 듯싶다. 종이를 울리기도(?) 하고 종이에 베이기도 하면서 연필과 제도기를 다뤄 저마다 개성을 발휘했던 장인적인 자긍심마저 잃어버린 느낌이다.

현대를 성장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지만 성장보다 ‘포장술’이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포장지가 내용물보다 더 버리기 아까운 시대, 인간의 변덕에 기대 소비욕구를 부추기기 위한 테크닉의 모색이 자본주의 본질인데 그것을 기술의 발전이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싶다. 현대 문명은 점점 거품이 심해지고 더 세련되고 교묘하게 착취를 하지만, 착취와 피착취의 경계 또한 모호해지고 있는 것이다. / 나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