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 칼럼] 여가(餘暇)

기사입력 : 2016년 10월 27일

새로 사온 왕사를 어항 바닥에 깔고 둔덕을 두어군데 만든다. 골이 진 곳에 수초를 심고 소라껍질이며 돌을 배치한 후 방울방울 산소공급기를 가동한다. 열대어를 풀어 넣고 조명을 켜니 그럴싸한 수중세계가 펼쳐졌다. 남편은 벌써 두 번째 어항을 뒤집어 재정비하고 있다. 이끼를 제거한답시고 모서리를 너무 세게 문질러 물이 샌 탓에 다 세팅한 어항을 다시 비워 땜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휴일오후에 벌인 일이 저녁때를 넘기고야 끝났다. 물고기 건사하는 일은 순전히 남편 몫이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세상사 따위 끼어들 여지없는 몰입, 그런 몰입을 바라보는 사람까지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열대어 기르기에는 캄보디아가 최적이다. 일단 애어가가 많다. 금색이 ‘돈’을 의미하는데다 물고기 ‘어(魚)’자가 남을 ‘여(餘)’자와 중국어 발음이 거의 같아 뼛속까지 장사꾼인 중국계 캄보디아인 대부분이 금붕어 종류를 기르기 때문이다. 열대지방인 캄보디아에서 맞는 모든 밤이 ‘열대야’이듯이 이곳에서 서식하는 물고기는 말 그대로 모두 ‘열대어’이다보니 가격 또한 싸다. 한국에서는 수종에 따라 열대어 한 마리당 꽤 고가나 이곳에선 보통 열 마리 단위로 판다(관상어샵에서나 볼 수 있는 실버바브나 비파가 음식점 수족관에서 유유자적(?) 차례를 기다리기도 한다). 수중세계의 생태계도 인간세계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멋모르고 다 함께 키웠을 때 기억에 의하면 예쁘고 순한 종일수록 수명이 짧다. 덧없이 사라져서 아름다운 것인지 아름다워서 덧없이 사라지는 것인지. 바닥을 박박 기며 이끼와 찌꺼기를 먹고사는 수족관 청소부 캣피쉬는 오래 사는 편이다. 약한 것들을 끈질기고도 악랄하게 괴롭히는 성질 사납고 덩치 큰 시클리드 가 끝내는 어항을 독차지 하고 만다. 인과응보나 사필귀정 같은 개념은 자연계의 질서와 상관없이 나약한 인간이 만들어낸 희망사항에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꽃을 감상하면서 남의 출세 따위를 화제에 올리는 건 꽃을 욕되게 하는 짓이라고 썼던 꽃 애호가 원중랑(16세기 중국문인)이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는 얘기를 해도 재미가 없고 얼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모두 즐기는 도락(道樂)이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만사가 마뜩찮아 매사 심드렁해하는 사람이 가장 매력 없다는 의미다. 우리 주변에서도 세상사 재미없어하는 얼굴을 흔히 볼 수 있다. 돈을 벌 때와 손해를 볼 때 외에는 기쁨도, 슬픔도 느끼지 못하게 되고 마는 자본주의 폐해로 인해 삶에 대한 다층적인 감각을 잃어버린 탓인지 모르겠다. 무기력이야말로 현대사회에 만연해있는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이다. 우울증의 반대는 행복이 아니라 활력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몰입할 수 있는 루틴을 늘이는 게 예방과 치료에 도움이 될 터이다. 뭔가에 몰입하는 동안만큼은 불안감의 공격이 멈추지 않던가. 밥벌이와 무관하여 감정노동이 수반되지 않는 여가활동, 일테면 관상어사육, 화초재배, 천연비누제조, 퀼트 등, 고물고물한 노동취미 하나쯤 갖는 것도…/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