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칼럼] 존엄사 법제화에 대한 소고

기사입력 : 2012년 11월 27일

야자수 그늘 아래 서로 눈을 떼지 못하는 연인들, 겉창을 열고 유리창 안팎을 쉼 없이 닦는 처자, 불가해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남자…우리는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다. “인생은 여행이고 죽음은 그 종점이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이처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있는 한’ 결코 체험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남에게나 일어나는 일인 양 치부하기 십상이다. 타인의 죽음이라도 그리 수월해 보이지 않는다. 가망 없는 환자를 돌보느라 삶이 엉망으로 뒤틀리고 사망 후에도 가족 간 골이 깊어지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리라. 아쉽다 싶던 참에 확고하게 절명하는 것도 크나큰 복이지 싶다. 어떤 농담질을 해도 통하는 사람과 맛난 음식을 나눈 후 슬며시 꽃잠에 빠지듯, 그렇게 일상의 한 부분처럼 죽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존엄사를 허용하는 법제정 추진이 결정됐다고 한다. 존엄사란 회복 불가능한 말기환자에게 과학기술에 의존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인간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으며 죽음을 맞게 하는 것이다. 유럽선진국등지에서는 이미 법제화 한 상태다. 언젠가 해외토픽에서, 건강이 멀쩡한 노인이 안락사를 요구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친구들이 하나 둘 유명을 달리해, 자신의 호불호가 무엇인지, 밥벌이는 어찌 꾸려왔는지, 사랑하는 이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떠나보냈는지…자신의 역사를 알아주는 친구가 아무도 없는 세상을 더 살아서 뭐하겠냐는 게 안락사 요청 사유였다. 사뭇 오래 전에,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환자 중 남성 심벌 확장시술을 받는 경우가 흔하다는 의료계 보도를 읽은 적도 있다. 자신의 주검을 처리할 장의사에게 완전무결한 남성으로 비치고자 하는 게 그 이유라고 했다. 일면식조차 없는 사람의 눈에라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남고자하는 심리, 사랑하는 이 하나 없는 삶과 죽음을 동격으로 여기는 심리, 죽음에 임하는 인간의 태도는 심오하기 이를 데 없다.
 
앞으로 존엄사의 범위는 확장될 터이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라”는 옛말이 저주에 가까운 욕으로 통하는 걸 보면, 우아하게 죽고자하는 바램은 예부터 내려오는 인류의 보편적인 정서임에 틀림없으니. 오히려 과학의 권력이나 과학적 미신이 자연스러운 죽음을 훼손해온 듯싶다. 나는 잘 익은 총각김치 한 쪽 맛나게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삶의 보람을 느낄 만큼 생명의지가 강한 사람이지만, 정신 줄을 놓은 상태로 짐승처럼 사육되기는 말 그대로, “죽기보다 싫다”. 사뭇 오래 부려먹은 탓에 주고도 욕먹을까싶지만, 앞날이 창창한 아까운 인생을 위해 장기나 안구 등을 기증 하고 마감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좋겠고. 그래도 ‘뇌’ 이식만은 절대사절이다. 살아오는 내내 남몰래 즐겼던 건전치 못한 야릇한 상상을 몽땅 들킬 생각을 하면 편히 눈을 못 감을 것 같다./ 나순 (건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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