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Y와 K’ve 엔터테인먼트 나윤정 대표 “이제는 제2의 조국, 캄보디아”

기사입력 : 2025년 09월 15일

#DSC_7074_WS▲SDY, K’ve엔터테인먼트 나윤정 대표

캄보디아에서 살다 보면 종종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든 버티며 자리 잡은 사람들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봉제업에서 출발해 인테리어 기업 SDY를 키우고, 동시에 K-pop을 현지에 전파해온 K’ve까지, 두 회사를 이끌고 있는 나윤정 대표의 이야기는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처럼 들린다. 국어 선생님으로 출발해, 봉제·인테리어·문화사업까지 이어온 그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 같다. 한국에서의 안정된 길을 뒤로하고 캄보디아에 발을 디딘 지 어느덧 20년 가까이. 나 대표와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눠봤다.

Q. 한국에서는 선생님이셨다고요.
맞습니다. 국어교육을 전공했고 중등 정교사 자격도 있습니다. 대학 입시 종합반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국어보습학원을 열었습니다. 대치동 에서 학원을 한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아시잖아요. 다행히도 학원은 잘 자리 잡았고 국어 선생님으로서 보람 있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결혼을 하면서 인생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시댁이 섬유관련업을 했는데 캄보디아에 대형 봉제공장이 들어오던 시기에 그 틈새 시장을 노리고 진출하게 된 거죠. 처음엔 남편이 먼저 정착하고 저는 한국과 캄보디아를 오가다 결국 2008년에 모든 걸 정리하고 완전히 캄보디아로 이주하게 됐습니다.

Q. 캄보디아에서 처음 한 사업은 무엇이었나요?
처음엔 봉제업을 했습니다. 2007년~2015년까지 꽤 오래 이어갔지만 캄보디아의 가파른 인건비 상승에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그래서 업종 전환을 결심했고 목재와 인테리어 분야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 결과 2015년에 SDY를 2016년에는 K’ve를 설립하게 됐습니다.

Q. SDY가 지금처럼 자리 잡기까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봉제에서 인테리어로 전환하면서 기존 생산 라인을 정리해야 했거든요. 그 모든 것이 개인 사업자한테는 모험이었죠. 저 흐르는 메콩강이 내 무덤이다~ 하는 절박함으로 하루하루를 보낸 정신없는 시기였죠.
하지만 한 가지 확실했던 것은 ‘제조는 직접 한다’는 거였습니다. 처음부터 로컬 시장을 목표로 삼았기에 아웃소싱으로는 절대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구, 도어 같은 핵심 공정은 직접 생산했습니다. 덕분에 단가를 낮출 수 있었고 한국 특유의 디자인적인 감성과 끝마무리, 무엇보다 사후관리(A/S)를 원활하게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로컬 고객층을 빠르게 확장하고 외국 기업인 저희에 대한 신뢰도를 굳힐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Q. 코로나 시기에도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나요?
코로나 때는 캄보디아에 진출했던 거의 모근 외국 기업들의 프로젝트는 멈췄고 그나마 로컬 프로젝트는 규모가 줄었지만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저희가 외국 기업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로컬 중심으로 운영했기 때문에 끝까지 버틸 수 있었죠. 코로나 시기 수년을 지나오면서 많은 외국 인테리어 업체들이 철수를 하거나 직격탄을 맞은데 반해, 상대적으로 저희는 ‘로컬에 뿌리를 둔 운영 방식’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고 보다 큰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Q.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를 꼽는다면요?
칩몽 그룹의 보레이 주택 프로젝트에 꾸준히 참여했습니다. 또 동남아시안게임 선수촌 콘도, 관공서, 대학교, 병원 인테리어도 맡았고요. 한국 기업으로는 신한·우리은행 캄보디아 지점들, 부영타운몰 등의 인테리어도 진행했습니다.

Q. SDY가 특별히 주목받은 부분 중 하나가 장애인 고용입니다. 계기가 있었나요?
사실은 거창한 계기가 없었어요. 장애인 학교를 후원하면서 관계를 이어오던 중, 목공 기술을 배운 학생들이 졸업 후 취업이 어렵다고 하길래 자연스럽게 몇 명을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비장애인 직원들이 “내가 일을 더 떠안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걱정은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장애인 직원들이 성실하고 꼼꼼하게 맡은 일을 해냈거든요.
지금은 공장 직원의 10% 정도가 장애인이고, 이직률은 거의 0%에 가깝습니다. 현장에서 이뤄지는 설치업무는 육체적인 능력이 필요해서, 장애인 직원들은 주로 공장 내 자리에서 검수와 제작을 책임감 있게 해내고 있습니다.
저는 장애인 고용을 ’특별한 사회적 책임’을 갖고 한 게 아니라, 그냥 연이 닿은 분들에게 일 할 기회를 제공한 것 뿐입니다. 이 분들의 능력이 열등했다면 이렇게 장기적으로 장애인 고용이 지속되지 않았겠죠. 이분들이 보여주는 성실함과 꾸준함은 회사에도 큰 자산이 되고 있습니다.

Q. 장애인 고용에 관심있는 한국 기업에게 알려주고 싶은 점이 있으시다면요?
캄보디아 사회복지부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직업 교육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네일케어, 마사지부터 목공, 영어까지 다양한 기술을 배운 친구들이 있어요. 선입견만 내려놓으면 의외로 능력 있는 인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관심 있는 기업들은 사회복지부에 문을 두드려보세요. ‘일방적인 지원 대상’이 아니라 ‘숨겨진 보석’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셨으면 합니다.

IMG_1900_WS▲최근에 케이브엔터테인먼트가 동남아 10개국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은 Nchive (6인조 Kpop 보이그룹)

K’ve 엔터테인먼트의 시작
Q. 지금은 K팝, K컬처가 대중화됐지만 초창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현지 TV K팝 오디션 프로그램 기획과 스타 초청 공연을 시작하신 분으로 알고 있는데요, 당시 어떤 노력이 있었나요?
처음에는 단순히 K팝 오디션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엔터일이됐습니다. 사실 사업성을 보고 한 게 아니라, 방송국 관계자들과 “한번 해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대화 끝에 급하게 추진된 프로젝트였어요. 그런데 오디션이라는 게 위너가 나오잖아요. 1등, 2등, 3등이 나오니 그 친구들이 단순히 프로그램의 주인공을 넘어서, ‘K팝 스타’로서 꿈을 이어가고 싶다고 요청을 해왔습니다. 그 순간부터는 단순히 프로그램 제작자가 아니라, 이들의 꿈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게가 제게 주어졌습니다.
캄보디아 연예계 생태계는 규모가 작기 때문에 처음엔 ‘스타 매니지먼트’ 같은 걸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끝난 뒤, 자연스럽게 매니지먼트와 이벤트 기획을 맡게 된 거죠. 어찌보면 책임감에서 비롯되서, 등떠밀리듯이 시작된 거였어요.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건, 오디션 우승자를 한국 무대에 세우자는 제안이 현실이 됐다는 겁니다. 주한 캄보디아 대사관과 연결이 되면서 수원과 안산 지역에서 열린 문화축제 무대에 우승자를 세울 수 있었어요. 그때 “아, 이게 단순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아니라 진짜 한 사람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일이구나” 하는 걸 실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스타 매니지먼트와 공연 기획, 문화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처음엔 결코 사업성이나 시장성을 보고 뛰어든 것이 아니었지만 작은 시도가 새로운 길을 열게 된 셈입니다.

Q. K’ve가 첫 진출할 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죠? 예전과 지금은 어떤 점이 다른가요? 또 K팝 아카데미처럼 문화인재 육성 사업에도 관심이 있으신가요?
K’ve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캄보디아에 보이그룹이나 걸그룹조차 없었고, 춤추며 노래하는 팀도 드물었습니다. 스타 매니지먼트를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가 없다 보니 캄보디아 방송 관계자들도 “하지 말라”는 충고를 할 정도였죠. 그럼에도 저는 연예인들을 억지로라도 방송에 세우며 길을 만들었습니다.
초기 5년 반은 줄곧 적자였습니다. 사람들은 K팝을 좋아했지만 그저 ‘먼 나라의 노래’로만 여겼어요. 그러나 빅뱅, BTS 이후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단순히 동경을 넘어서 노래하고 춤추며, 관련 소비까지 이어지는 단계로 발전했습니다.
이제는 캄보디아 청년들이 단순한 팬을 넘어 문화의 주체로 성장할 가능성이 보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K팝 아카데미 같은 문화인재 육성에도 관심을 두고, 현지에서 스스로 콘텐츠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기반을 키우고 싶습니다.

Q. 최근에는 활동 영역도 넓혔다고 들었습니다.
네, 코로나로 공연과 축제가 멈추는 동안 광고·마케팅으로 분야를 확장했습니다. 한국 기업과 상품이 캄보디아 시장에 자리 잡게 돕는 거죠. 젊은 층에게 브랜드를 알리고 실제 소비로 이어지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K’ve가 문화와 비즈니스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게 바램입니다.

Q. 기부와 사회공헌 활동도 꾸준히 이어오셨습니다.
나윤정 대표는 사업 활동 못지않게 사회공헌에도 힘을 쏟아왔다. 태국 국경 분쟁 당시에는 소속 연예인들과 함께 성명 발표와 영상을 제작하고, 모금을 통해 구호물품과 현금을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현지 젊은 층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우리도 캄보디아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온 것도 인상적이었다. 나 대표는 “이후 감사장을 받았지만, 상보다는 작은 행동이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더 뜻깊었다”고 회상했다.
교육 지원 역시 그가 오랫동안 이어온 활동이다. 프놈펜 한글학교와 한국국제학교에 책상, 의자, 기자재를 꾸준히 후원해왔는데, 그 시작은 직접 교사로 봉사했던 경험에서 비롯됐다. “한글학교에서 4년간 교사로 봉사하면서 감사장을 받았는데, 오히려 마음의 빚이 남았어요. 그래서 지금도 기회가 되면 교육 현장을 돕고 싶습니다.”라고 덧붙였다.

Q.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예산이 부족한 기업들이 제가 주관한 행사에서 원하는 만큼 홍보를 하고 그 뒤로 감사 인사를 받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또 K’ve 대표 아티스트 미나(MINA)가 공항 내외 광고판을 점령했을 때 한국과 캄보디아 양쪽에서 성과를 확인했을 때도 큰 뿌듯함이 있었습니다.

Q. 사업을 운영하시면서 억측들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말도 많은 한인 사회에서 뿌리를 더 깊이 내릴 수 있었던 저력은 무엇일까요? 힘들 때마다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나요?
저는 MBTI가 ESTJ인데요, 늘 마음속에 두는 건 “내가 먼저 똑바르게 서야 한다”는 겁니다. 제 자신이 떳떳하면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제 신조는 단순합니다. ‘누가 뭐래도 내가 바르게 살자.’ 지금까지도 그렇게 노력해왔습니다.
그동안은 주로 로컬 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최근 민주평통 활동을 하면서 교민 사회와도 접점이 많아졌습니다. 이제는 저를 아시는 분보다 모르시는 분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저를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결국 교민 사회도 하나의 사회이고, 여기서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바르게 살아가며 필요한 역할이 있을 때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돌아보면 30대 초에 이곳에 와서 어느덧 50대가 됐습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고, 이제는 선참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면 그또한 할 생각입니다. 소문이든 평가든 결국은 따라오는 것이니까, 더 바르게 살고 주위도 좀 더 돌아보며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게 제가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Q. 이제 캄보디아는 대표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제 인생의 3분의 1 이상을 캄보디아에서 살았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만 봐선 한국에서 보낸 시간보다 캄보디아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길어요. 가족도 다 여기 있고, 이제는 제2의 조국입니다. 한국에 가 있어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집이 바로 캄보디아죠.

Q. 마지막으로 교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긴 글을 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요새처럼 카더라와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에서 뉴스브리핑캄보디아 같은 정론지가 장수하고 버텨준다는 것, 교민의 일원으로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런 정론지가 오래갈 수 있도록 교민 여러분들께서 더 많이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캄보디아라는 척박한 이국땅에서 정착하고 살아가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치열히 고생하시는 교민 여러분들 우리 모두 함께 힘내시고 서로를 위하고 위로가 되는 끈끈한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화이팅입니다./정인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