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창문을 열고] 죄의 삯은 사망이요

기사입력 : 2023년 11월 06일

(2023년 1월 27일 연재 칼럼)

어느 나라든지 애나 어른이나 안 좋은 건 빨리 배운다. 우리나라에 ‘왕따’라는 것이 10대 문제로 자리잡은 것은 30여년 전 즈음 일본에서 ‘이지메’라는 문화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었다. 암암리에 교내에서 약자를 괴롭히는 것의 시작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된 것이 그쯤으로 추정된다. 학교 내외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상해, 폭행, 감금, 협박, 모욕, 공갈, 강요, 성폭력, 따돌림 등을 통해 신체 및 정신적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이다. 가해자의 경우 ‘친구끼리 하는 장난’ 가해자의 부모의 경우 ‘애들끼리 그럴 수도 있지’ 정도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범죄행위다. 그들은 친구가 아니며, 애들끼리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정녕 모르는 걸까.

어린 시절 잠시지만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기억이 있다. 북적거리는 반 안에 혼자라는 소외감은 지금까지 솜털 한올 한올을 빳빳하게 세우는 불쾌감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폭행이나 모욕을 당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요즘 화제인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는 학교폭력의 잔인함과 2차, 3차 피해자의 피폐해진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시청자들은 처참하게 무너졌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것을 꿈으로 삼고 복수를 향해가는 모습을 보며 짜릿한 통쾌함을 느낀다. 사실, 이것 또한 피해자가 또 다른 가해자가 되어가는 과정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가해자 무리가 공포에 떠는 모습에 시청자는 안위를 얻는다. 참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렇다.

악은 악을 낳고, 죄와 악이 하나가 되고, 죄악은 결국 사망을 낳는다. 가해자를 죽이거나, 스스로가 죽어야 끝나는 지지부진한 길을 자처하여 들어온 주인공이 애처롭다. 정당한 죄의 값을 치루는 것 이상의 복수는 또 다른 죄악을 낳는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것이 보복심리라는 것이 아닐까 씁쓸한 마음이 오래도록 남는다.

양육하는 과정에서 부모가 아이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말고, 아이들은 부모를 공경하며, 우리 모두가 상대방보다 낮은 자리에서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상대방의 연약함을 보듬아 주길.. 그런다면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