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더 알아보기] 제61화 노동운동가 찌어 위찌어 암살과 조작된 범인

기사입력 : 2021년 07월 02일

찌어 위찌어(Chea Vichea)는 캄보디아에서 1997년에 결성된 자유노동조합의 대표로 활동하던 열혈 노동운동가이자 삼랑시당의 충실한 당원이었다. 제3대 캄보디아 총선이 있던 2003년7월 전후는 정치인, 법조인, 승려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암살당하는 피의 역사를 그리고 있었다. 총선 결과 CPP는 47.35%로 단독정부 구성에 실패했고, 야당 또한 연대에 실패함으로써 국회는 1년간 파행이었다. 당시 봉제공장 노동자 4만 명에게 영향을 끼쳤던 찌어 위찌어는 핸드폰으로 ‘캄보디아를 떠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 메시지를 받았고, 이듬해 중국 춘절인 1월22일 아침 신문가판대에서 세 발의 총격으로 36세의 나이에 즉사했다.

수정됨_61-07▲ 2019년1월, 프놈펜 독립기념탑 근처의 찌어 위찌어 석상에서 사망 15주년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노동조합 관계자, 봉제공장 노동자 및 시민사회 활동가의 모습

이후에 심상치 않은 국내외 여론과 대규모 소요사태를 의식한 경찰 당국은 목격자의 진술이 반영되지 않은 범인 몽타주를 제시하며 범인 검거에 일주일을 장담했다. 그리고는 무고를 주장하는 두 사람을 체포했고, 알리바이 증언도 생략한 채 거듭된 재판으로 20년형을 때려 버렸다. 당시의 기소 과정이 담긴 유튜브 영상에서 죽은 자보다 더 황망해 보이던 것은 끌려가면서 몽타주를 똑닮은 한 사람의 자포자기한 모습과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겠다고 ‘무고’를 부르짖던 다른 사내의 눈물범벅된 모습이다. 이들은 국제사회의 끈질긴 규탄으로 무려 10년째인 2013년9월26일에야 겨우 풀려났고 어떠한 보상이나 위로도 받지 못했다.

그 후로 찌어 위찌어 사건은 계속 미제로 남아 있다. 2020년6월에 훈센 총리 등에 의해 프랑스법원에 명예훼손 혐의로 제소된 삼랑시가 ‘이번 기회야말로 찌어 위찌어 사건의 진실을 밝힐 절호의 기회’라고 맹공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언론에서 부각된 관련자들은 현재 공개적으로 진술이 불가능한 상황인 듯하다. 얼굴 몽타주를 제시하며 무고한 범인을 잡아들였던 프놈펜 경찰청장은 각종 부패에 연루되어 2006년12월부터 감옥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다. 또한 그가 수감되기 전에 해외도피 과정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자신에게 찌어 위찌어 사건의 범인을 조작하라고 지시한 윗선은 2008년11월에 헬기사고로 돌연사 했다.

이처럼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한 찌어 위찌어는 1968년에 끄라쩨주에서 4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모는 크메르루즈 정권기에 살해됐고 그는 형제들과 바탐방주의 노동 수용소에서 가축 돌보는 일을 했다고 한다. 1988년에 장학생으로 러시아에서 농업을 전공한 그는 1995년에 귀국하자마자 삼랑시의 크메르민족당(KNP) 창당에 헌신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국제노동기구(ILO)의 기준에 부합하는 노동법이 부재했던 1996년에 찌어 위찌어는 자유노동조합(FTU)를 결성하기로 결심한다. 당시 캄보디아의 봉제공장은 작업현장의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할 노동조합이 거의 없었고, KNP는 이를 착안해 정책에 반영함으로써 지지를 확보하려고 했다.

수정됨_61-03▲ 생전에 봉제 공장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주도하던 찌어 위찌어의 모습

찌어 위찌어는 FTU의 대표로서 노동자들을 규합하고 데모와 시위를 급증시키는 데 크게 활약했다. 당국으로부터 시위 진압을 목적으로 폭탄이 투척되고 두들겨 맞거나 살해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이처럼 캄보디아의 경제개발 초창기에 고용주를 상대로 봉제공장 노동자의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투쟁하던 주도자였다. 캄보디아에서 ILO 권고를 따른 노동법이 처음 시행된 1997년 봉제공장 노동자의 최저임금은 $40였고, 그가 죽기 전까지도 45달러에 그치다가 2007년 $50, 2017년 $153, 2020년 $190로 비약적으로 인상됐다. 오늘날까지 그가 살아 있었다면 당시에 비해서 과연 다소나마 흐뭇해 할지 어떨지 참으로 궁금하다./왕립프놈펜대학교 한국어학과 이영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