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한인 선교사 이야기] 제 23 화 꿈과 희망이 자라는 캄보디아 호산나학교 20년

기사입력 : 2020년 11월 06일

20세기 마지막 해인 1999년 캄보디아 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고, 그중 가장 고통받는 층은 어린이들이었다. 그해 4월, 예장합동 총회세계선교회(GMS) 파송, 신평로교회 주 후원으로 캄보디아에 입국한 정순영 선교사는, 어떻게 하면 그런 어린이들을 캄보디아 미래 주인공으로 세울 수 있을까? 라는 기도를 하던 중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더라’(마 21:9)는 말씀을 붙들고, 2001년 8월 15일, 프놈펜의 빈민가 중 한 곳인 스텅미언쩌이(Stung Meanchey) 지역에 호산나유치원을 시작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언 1:7)는 말씀을 교육 이념으로 삼았다. 첫 유치원은 마당이 아주 넓었던 목조 건물에서 세 명의 교사와 4세-6세의 어린이 40명으로 시작되었다.

820-1▲ 호산나 제1기 유치원생(2001년)

이듬해에는 유치원 졸업생을 이어받아 초등학교를 시작하였다. 1층은 유치원, 2층은 초등학교로 사용하던 중, 해마다 학년이 올라가고 학생 수도 증가하면서, 더 넓은 교육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2004년 8월, 근처의 석조 건물, 개인 주택을 임대하여 이전하였다. 개인 주택을 개조하여 사용하는 교실들은 협소하고 다소 불편하였지만, 2층 건물에 옥상이 있어 활용할 수 있었다. 해마다 증가하는 학년을 따라 계속 교실을 나누어야 했는데, 비록 옥상을 양철로 개조한 학교 건물의 외모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넘쳤으며, 미취학 빈민 아동들에게 한국의 최신 교육 기법과 내용을 중심으로 성실하게 가르치는 최고의 교육장이었다.

개교 8년을 맞은 호산나학교는 한 번의 큰 변화가 있었다. 해를 거듭하며 중학교까지 시작되었기에 학생 수는 계속 증가하였고, 교실 부족과 학습환경의 열악은 더 간과할 수 없었다. 그때 주님께서는 GMS 캄보디아의 선임인 김항철 선교사를 사용하셨으며, 그로 인해 호산나학교는 고 오형석 선교센터로 이전하게 되었다. 10년간 땀과 피눈물로 함께 울고 웃었던 스텅미언쩌이 지역을 떠나 2010년 8월, 뽀첸통(Po Chentong)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2012년 4월에는 신규로 구입한 부지에서 호산나학교 교실 기공 예배를 드리고, 2014년 1월에는 중고등학교 교실과 각종 부대시설, 강당을 포함한 3층, 건평 600평 건축 준공 예배를 드렸다.

820-2▲ 호산나학교 학생과 교직원 전체(2019년)

2014년 11월, 19명의 호산나고등학교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2020년 11월에는 제7회 졸업생을 배출할 예정이다. 현재 졸업생 중, 네 명은 한국에서 유학 중이고, 캄보디아에서는 프놈펜 왕립의대, 약대, 건축대, 법대 등으로 진학하였으며, 여러 졸업생은 은행이나 기업에 취업하였다. 2010년 3월에 시작된 합창단과 2012년 12월에 시작된 앙상블은 2015년과 2020년, 이미 두 차례 내한 공연을 다녀왔으며, 캄보디아 국가나 기독교계의 중요한 행사에 초청받고 있다. 2003년부터 전교생이 배우기 시작한 태권도는 수많은 대내외 수상과 함께, 캄보디아 국가 대표 선수를 배출하였고, 2011년부터 시작한 펜싱 역시, 국가대표를 배출하였다.

무엇보다도 큰 열매는 호산나유치원과 초등학교의 졸업생들이 호산나유치원과 초등학교의 교사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많은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그들이 섬기는 교회에서 예배를 돕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년간, 호산나학교는 150여 명을 캄보디아 국가와 사회의 일군으로 배출하였으며, 현재 500여 명의 학생과 50여 명의 교직원은 ‘캄보디아의 꿈과 희망이 자라는 교육 공동체’로 거듭나는 중이다. /장완익 선교사 (KMAC 역사연구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