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한인 선교사 이야기] 제 13 화 1998년과 1999년, 새천년 맞을 준비로 설레던 때

기사입력 : 2020년 09월 24일

1999년까지 캄보디아에 입국한 한인 선교사는 약 20여 가정이었으며, 캄보디아의 정치 경제적인 안정과 함께 선교 사역도 점점 확장되었다. 캄보디아는 1999년 4월,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ASEAN)에 가입하였는데, 이는 캄보디아 국가 발전의 기폭제가 되었다.

한인 교민 역시,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교민 중에는 비록 공식적으로 선교사 파송은 받지 않았지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개인적인 은사를 드리면서 캄보디아 선교 사역에 동참하는 경우도 있었다. 최용석 사범은 1996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 파견으로 캄보디아에 입국하여 캄보디아 태권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활동하였으며, 차츰 군대와 경찰 그리고 일반 학교 및 체육대학 등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면서 주님의 제자를 세웠다.

1999년 2월, 송진섭 선교사, 김인순 선교사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캄보디아감리교신학교 첫 졸업생 17명과 함께 캄보디아 감리교회(MCC: Methodist Church in Cambodia)를 설립했다.당시 ‘캄보디아 한인 선교사회’에서는 1997년 12월 6일에 회지 창간호(발행인 김한주 선교사)를, 1998년 12월 12일에 제2호(발행인 송진섭 선교사)를 발행하였는데, 그 가운데 두 가지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810-2▲ 캄보디아감리교신학교 첫 졸업식(1999년)

딸과 사역으로 기쁨 얻는 홍경표(박은여) 선교사 가족: 기독교 교육학을 전공하셨다는 홍 선교사님의 자녀교육 방법과 지도는 참 구체적이다. 먼저 부모가 본을 보여 책을 늘 가까이 대하며, 자녀의 동일 관심사를 읽고 나누며 기도한다. 홍 선교사님 댁에는 그래서인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천정까지 닿는 나무로 만든 큰 책꽂이가 있다. 외동딸 지혜(16살)에게 어릴 적부터 의도적으로 기도와 말씀 보는 시간을 꼭 갖도록 지도하고 확인하여 스스로 하나님 앞에 은혜받고 간구할 줄 아는 소녀로 자라게 하셨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반드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국제학교에서 학년말, 8개의 상을 받는 지혜를 보며, 기쁨을 감출 수 없어 하셨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규례는 반드시 지킬 것을 요구하나 선교사 자녀로서의 틀을 씌워 자유함이 없는 일은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것은 누구도 자녀교육의 성패를 지금은 결정할 수 없는 사실도 고백하시며, 자녀가 40살 되었을 때야 이 일의 열매를 볼 수 있다며 현 상황을 주님께 맡기길 원하신다. -편집부-

810-1▲ 캄한인선교사회 수련회(1997년)

소수종족 전도 (EFC 총무): 1998년 5월 4일부터 11일까지, EFC 동료 9명과 함께, 캄보디아 중북부 지방에 위치한 몬돌끼리를 방문했다. 새벽에 차를 타고 프놈펜을 출발하여 깜뽕짬, 끄로쩨를 통과하여 몬돌끼리를 향하여 갔다. ‘끼리’라는 말은 캄보디아어로 ‘산’이란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몬돌끼리는 ‘몬돌산’이란 의미이다. 깜뽕짬에서 끄로쩨까지는 비로 인하여 길이 끊기고 미끄러워서 여행하기가 매우 곤혹스러웠다. 끄로쩨에서 몬돌끼리까지는 벌목한 나무를 수송하기 위해 다져놓은 새로운 길로 갔다. 그 길에는 우리 차밖에 없었다. 이번 우리의 여행 목적은 교회들을 돌아보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데 있었다. 나는 부우쓰라, 닥땀, 까이시마, 뻿쩐다, 품트마이교회의 지도자를 만났다. 주일날 우리는 이들 교회와의 교제로 기뻤다. 이들은 약 400명 가량 되었다. 그들은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다. 그들은 걸어서 산을 넘고 내를 건너, 어떤 때는 하루종일, 때로는 반나절을 걸어서 지치지 않고 교회로 온다. 우리는 부우쓰라 폭포에 가서 약 50명의 성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편집부-/장완익 선교사 (KMAC 역사연구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