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한인 선교사 이야기] 제 11 화 서경기 선교사의 캄보디아 선교 간증, 세 번의 위기

기사입력 : 2020년 09월 14일

808-1▲ 서경기/김말희 선교사 가족(1998년)

서경기/김말희 선교사 가족은 1996년부터 1999년까지, 프놈펜기술학교를 섬기면서 크게 세 번의 위기를 겪었는데, 이를 다음과 같이 간증하고 있다.

첫 번째는 1997년 7월 내전으로, 수도 프놈펜은 순식간에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다. 군인들은 우리 학교가 접해 있는 마오쩌뚱 거리에서 지나가는 오토바이들을 빼앗았다. 그들은 반항하는 이들을 상대로 위협용 총을 쏘아댔는데, 그때마다 우리 가족은 급히 바닥에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외국인들은 대다수 출국했고, 일부 한국인 선교사들도 그리했다. 우리는 입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철수할 수가 없었다. 철수하면 다시 입국할 의지가 없을 것 같아서, 캄보디아에 머무르기로 했다. 힘든 날들이었지만 우리는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를 얻었다. 그때까지 캄보디아 스태프들과 서먹서먹하였는데, 우리가 남아 있으니 그들은 우리를 신뢰했고, 우리와 함께 힘껏 일했다. 우리 학교에 NGO 허가를 내준 외무부와 사회노동부는 철수하지 않는 우리에게 체류 비자를 6개월에서 1년으로 연장해 주었다.

두 번째는 1997년 말의 IMF 사태였다. 캄보디아 주재 한인 선교사들은 모두 재정 위기를 경험했다. 캄보디아는 지금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거래를 미화로 한다. 미화 환율이 엄청나게 오르면서 선교비는 2/3 정도 감액되었다. IMF 직전, 나는 우연히 로렌 커닝햄(Loren Cunningham)의 「벼랑 끝에 서는 용기」를 읽었다. 저자의 생각과 다른 부분도 있었지만, 재정에 대한 하나님 의지의 태도를 배웠다. IMF가 터지면서, 나도 그분처럼 하나님의 인도를 체험했다. 정한 때에 학교 운영비와 생활비가 오지 않아 마음이 힘들었는데, 그때마다 예상치 못한 방법을 통해서 재정이 채워졌다.

한 번은 은행 계좌에 오천 달러가 입금되어, 유용하게 학교를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은행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에게 지급할 액수의 두 배를 보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고 묻고는 본부에 확인한 결과, 은행이 착오를 일으켜서 우리에게 이중으로 이체한 것이다. 우리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필요한 재정을 사용할 수 있었고, 환율이 떨어진 이후에 이자도 주지 않고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서 차액을 돌려줬다.

808-2▲ 캄보디아 전도세미나(1997년 5월)

세 번째는 1998년, 도둑맞은 일이었다. 1997년 내전이 일어난 후에도 캄보디아 사회는 여전히 불안했다. 수시로 강도 살인이 일어났으며, 외국인들은 저녁에 거의 외출하지 않았다. 단기 선교팀이 오면 저녁에 외출하지 말라고, 특별히 강조했다. 어느 날, 나는 창립하는 한인 교회의 설교를 부탁받았다. 토요일에서 주일로 이어지는 한 밤에 학교 사무실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학교 기숙사에서 자고 있었다. 새벽 3시 넘어, 아내가 기겁하여 사무실로 달려왔다. 기숙사에 가보니 문 앞 복도에, 방안의 물품이 나와 있었다.

왜 이렇게 나와 있는가를 확인해보니 도둑이 들은 것이다. 그때는 IMF 시기로 외국계 은행들이 도산한다고 해서 우리도 돈을 찾아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 도둑은 그걸 노렸다. 도둑이 세간을 모두 뒤지고 심지어 복도로 끌어냈는데도 아내와 큰 애는 깨지 않았고, 사무실에 있는 나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가 한국에서 가져온 돈 가운데, 컴퓨터 한 대를 사서 학교에 기증하고 남은 모든 돈을 도둑맞았다! 너무나 분했지만, 너무나 다행이었다! 만약 그때 아내와 아이가 깨났다면, 내가 알아챘다면, 큰 불행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도둑과 마주쳐서 죽거나 상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생명을 보존한 것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했다!/장완익 선교사 (KMAC 역사연구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