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이야기] 제13화 난민촌에 전해진 빵과 복음

기사입력 : 2020년 04월 24일

1975년 4월 17일은 캄보디아 역사에서는 물론, 캄보디아 교회 역사에서도 잊지 못할 날이다.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폴폿 (Pol Pot)은 국명을 민주캄뿌찌아 (Democratic Kampuchea)로 개명하였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가 아닌 국수적 민족주의와 크메르루주 (Khmer Rouge)라는 군부를 배경으로 한 사회주의 정치를 펼쳤다. 캄보디아에 주재하는 외교관을 비롯한 모든 외국인에게 출국 명령을 내렸고, 자국인에게는 도시에 거주할 수 없도록 하였다. 학교, 병원, 공장, 기업체 등을 모두 국유화하였으며, 모든 형태의 종교가 조직적으로 말살되었는데, 개신교 역시 90%의 신자와 지도자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1976년 1월, ‘반동 종교’를 금지하는 헌법이 통과되었으며, 그해 4월 시아누크가 사임하자 국민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1977년, 훈센 (Hun Sen)은 베트남으로 망명하였고, 1978년 12월, 폴폿은 구 크메르 제국의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 남부 메콩델타 지역을 침공하였는데, 이는 베트남의 캄보디아 해방에 대한 긴박한 필요성을 확신시켰다. 1979년 1월 초, 캄보디아는 내전이 아니라 베트남과의 전쟁 국면으로 전환되었고, 헹삼린 (Heng Samrin), 찌어심 (Chea Sim)과 훈센을 앞세운 베트남 군대는 불과 수 주일 만에 일부 지역을 제외한 캄보디아를 해방하였으며, 이때 많은 캄보디아인은 전쟁을 피해 태국과 베트남 국경을 넘었다.

790-1▲ 태국에 세워진 난민촌 Site 2 캠프

수많은 캄보디아인은 태국 국경을 지나 다른 국가로 이주하기 위하여 난민촌에서 살았다. 캄보디아에서 출국한 선교사들은 태국, 라오스, 베트남 그리고 심지어는 미국에 자리 잡은 여러 난민촌에서 사역하였다. 태국 정부는 기독교인들이 난민촌에서 자유롭게 일하고 생활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고, 이는 많은 난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었다. 많은 베트남인과 캄보디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난민촌 중의 몇 채 건물은 교회로 사용되었다. 난민촌에서는 각종 음식 제공과 함께 교육, 종교 활동이 병행되었는데, 이러한 구호, 교육과 봉사 활동은 UN과 적십자사가 앞장섰으며, OMF, Southern Baptist, C&MA, CORD, World Relief, YWAM 등의 기독교 선교단체가 참여하였다. 한편 베트남 군대로 인해 크메르루주가 물러나자 캄보디아에는 베트남에 의한 괴뢰 정권, 캄뿌찌어인민공화국 (PRK: People’s Republic of Kampuchea)이 세워졌으며, 월드비전 (World Vision),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 (Mennonite Central Committee), CWS (Church World Service), UNICEF, ASFC, OXFAM, COER, LWS (Lutheran World Service) 등의 기독교 단체가 사역을 시작하였다.

790-2▲ 교회당 앞에선 캄보디아인 난민 기독교인

이 난민촌 사역은 캄보디아 교회사 중에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그동안 50년 정도의 캄보디아 선교를 미국 국적 배경의 C&MA 선교사들이 주도했는데, 난민촌 사역을 기점으로 다국적 그리고 많은 선교단체가 캄보디아 선교에 참여하였다. 그런데도 모든 단체의 배경은 서구권이었다. 둘째, 한국 기독교에서 캄보디아 선교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는 국제 YWAM의 구호 프로젝트 참여함으로 이루어졌다. 셋째, 교회 개척과 신학교 사역 그리고 성경 번역 외에는 다른 사역에 참여하지 않았었는데, 빵과 함께 복음을 전하기 계기가 되었다./장완익 선교사 (캄보디아교회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