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더 알아보기] 제3화 앙코르와트는 누가 지었나요?

기사입력 : 2019년 08월 02일

 

an-aerial-view-of-the-angkor-wat-temple-2앙코르 유적지를 처음 입장할 당시 현지 가이드를 따라서 야무지게 걷고 달려서 알차게 카메라 셔터를 눌렀던 것 같다. 그 중에서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재미있게 봤을 곳이 바로 앙코르와트의 1층 회랑의 벽면 부조이다. 힌두교 사상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대서사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 및 각종 인도 신화가 그려진 곳이다. 뿐만 아니라 앙코르와트를 건립한 크메르제국 절정기의 통치자 수리야바르만 2세와 군대의 행군하는 모습도 웅장하게 담겨 있어서 캄보디아의 역사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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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야바르만 2세(11세기~1150)는 왕족이었지만 변방에서 왕위를 이을 기회가 없었다. 그렇지만 왕권에 대한 열망과 왕재는 감출 수 없어서 1113년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의 백부이기도 했던 당시의 무능한 왕을 잔혹하게 살해한 뒤 왕좌를 탈환한다. 그리하여 나이 17세에 군대와 신하들로부터 충성서약을 받으며 태양(수리야)의 숭배자(바르만)라는 뜻의 왕호를 받는다. 그리고 힌두교 시바 신을 숭배하던 관습을 전환하여 비수누 신에 역점을 두고 제국을 새롭게 통합하고자 앙코르와트 건립을 기획하기에 이른다.

수리야바르만

▲수리야바르만 2세 석상

서쪽 회랑의 남쪽 벽화 마하바라타의 ‘쿠루평원의 전투’는 자신이 저지른 잔혹한 쿠데타에 대한 그럴듯한 변명이다. 마하바라타 이야기에 따르면, 반란군 수장 아르주나가 정부군이었던 사촌형제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앞으로 벌어질 대량살상과 권력무상으로 최후의 일격을 망설이자 비슈누 신의 화신 크리슈나는 선을 회복하는 다르마(정의)의 길로 당당하게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결국 수리야바르만 2세의 쿠데타는 다르마의 길이었던 셈이다.

랑카의전투

▲랑카의 전투

북쪽 벽화 라마야나의 ‘랑카의 전투’는 1129년 참파국(오늘날 베트남 지역) 침공과 1145년 정복을 상징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자신을 위대한 라마와 일체화시킨다. 당시의 정복 전쟁으로 오늘날의 태국, 베트남, 미얀마를 포함하는 인도차이나반도 전체가 크메르왕국의 영토였을 만큼 그 위세가 대단했다. 과히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비교해서 설명될 만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때 압송당한 포로들은 37년간의 앙코르와트 건립에 대거 동원됐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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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바라타 및 라마야나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비슈누 신의 인간계 화신이다. 즉, 수리야바르만 2세는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함으로써 비난받아 마땅했을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강력한 통치자의 면모를 강화하려 했다. 그래서 그밖의 부조에서도 비슈누 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신화들을 그려냈다. 이로써 시바신을 숭배했던 이전 왕들과 확실히 거리를 두고 비슈누 신을 전면에 부각시켜서 전제왕권의 신격화를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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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야나의 결미에서 신들에 의해 비슈누 신이 인간계 라마로 화신했음이 밝혀진다. 그리고 마하바라타의 결미에는 왕위를 내려놓은 아르주나 일파들이 신들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향한다. 이들과 동일시를 꿈꾸던 수리야바르만 2세도 마무리는 역시 신으로 부상하는 것이다. 곧 2층의 인간계를 떠나 제일 꼭대기 층의 신계에서 영원한 안식을 원했다.

그리하여 앙코르와트는 수리야바르만 2세 생전에 비슈누 신을 모시고 교감하는 사원이자 통치자의 신적인 위용을 드러내는 왕궁이었으며 사후에는 비슈누 신의 화신으로서 인간의 몸을 떠나 신적인 존재를 회복하리라는 설정아래 신성한 왕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