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 칼럼] 과연 파라다이스는…

기사입력 : 2016년 03월 16일

옷장을 열자 수십 벌의 재킷이 독일병정 도열하듯 걸려있다. 서랍장엔 넥타이들이 새로 산 색연필 케이스처럼 정연하다. 그 아래 칸엔 사각으로 접힌 드레스셔츠가 아귀가 착착 맞게 들어차 있다.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 American Gigolo>에서 지골로(제비족)로 분한 리처드 기어가 외출복을 코디하는 장면이다. 남성미란 다름 아닌 단단한 등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싶었던 기억도 있다. 그는 여성고객이 어디서나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반듯한 매너로 에스코트해주는 것은 물론, 쇼핑과 관람, 식사를 함께 하며 진득한 대화상대가 되어 준다. 운전사에 통역사, 쾌락 제공자 역할까지. 선정적인 제목과 달리 볼만한 영화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호사를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머지않은 모양이다. 자질구레한 가사뿐만 아니라 주인의 기호와 기분을 인지하는 인공지능 로봇이 배우자에게 요구하기 힘든 곰상스럽고 껄끄러운 일까지 다 알아서 해주는 시대. 일본에서 빨래를 개 주는 로봇을 개발했다는 소식이다. 이 로봇은 3D 스캐너로 이미지를 분석한 후 재봉선과 옷감, 부피를 고려해 옷에 구김이 가장 적게 가면서도 보관하기 쉬운 형태로 갠다. 지금은 세탁물 하나 개는데 10분이 걸리지만 2018년쯤이면 세탁에서 정리까지 7시간 안에 끝낼 수 있는 일체형 로봇을 시판할 수 있다고 한다. 졸음운전이나 음주운전 염려가 없는 ‘무인 자동차’를 비롯해 사람보다 똑똑한 ‘간병 로봇’ 등, 인공지능 기기의 등장이 속속 예고되고 있다.

기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은 끝이 없다. 18세기 말 생산설비 기계화의 1차 산업혁명, 19세기 말 전기에 의한 대량생산체제의 2차 산업혁명, 20세기 초 컴퓨터를 통한 자동화시스템의 3차 산업혁명을 거쳐 요즘은 ‘4차 산업혁명’이 화두인 듯하다. 올 초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의 주제가 ‘4차 산업혁명의 이해’였다니. 4차 산업혁명은 로봇,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바이오 테크놀로지 등의 새로운 기술 혁명으로, ‘빅데이터 연동에 의한 제품의 지능화’가 핵심으로 보인다. 정보기술(ICT)과 자동차를 접목한 구글의 스마트카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무한 정보력과 무한 조합능력에다 결코 지치거나 화내는 법이 없는 로봇이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과연 파라다이스로 이끌어 줄 수 있을까.

새로운 문명은 미덕과 함께 악덕도 동반하게 마련이다. 편리성, 생산성, 효율성 을 높여주고 일자리를 앗아갔던 여타의 산업혁명과 마찬가지로, 4차 산업혁명 역시 ‘일자리 절벽’이 가장 위협적인 요소라고 한다. 다보스 포럼 창시자 클라우스 슈밥은 “4차 혁명은 자본과 재능, 최고의 지식을 가진 이들에게 유리하다”고 했다. 고용시장의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는 의미일 테다. 사람은 의식주 못지않게 일을 통한 자긍심에 기대 사는 복잡한 존재다. 아주 낙관적으로 보아 어느 정도 성공적인 복지사회를 이룬다하더라도 초엘리트 직업군에 속하지 못한 절대다수의 ‘자긍심 절벽’ 또한 풀어야할 과제가 아닐까./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