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부돌카

기사입력 : 2015년 04월 23일

가리개에 비친 석양

지구 위 양성 나뉜 존재들에겐 암수의 끌림만큼 강렬한 게 드물리라.
산뜻한 봄날 어울리는 가벼운 이야기 하나 하자면 풋풋한 남녀들 모여 짝을 짓던 모임을 미팅이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상대방이 자신보다 월등하게 낫기를 바라는 심정은 남자 여자 다를 게 없었다. 그런 소망은 킹카 또는 퀸카라는 호칭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이때의 ‘카’는 서양 카드놀이의 ‘카드’를 의미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동양식 버전으로 하자면 화투놀음의 ‘패’와 비슷한 뜻으로 보면 되겠다. 인생사 대부분에서처럼 도박 또한 기본 패가 좋아야 결과가 좋을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니 미팅에서도 조건 좋은 상대를 당연히 기대하거니와 철부지 때는 외모에 비중이 높기 마련이다. 남자라면 퀸카를 여자로선 킹카를 원하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다. 생긴 것을 기준으로 파트너를 지칭하는 여러 칭호들이 유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최고의 이성 상대를 뜻하던 퀸카나 킹카와 달리 최악을 의미하는 것들도 여럿 있었다. 그 중에 압권(壓卷)으로 기억되는 건 부처님을 등장시킨 ‘부돌카’라는 용어였다. 부처님은 예수님과 더불어 색정(色情)으로부터 완전히 해탈한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기 저 크로마뇽인부터만 따져도 지구상에 존재한 인류의 숫자는 어마어마하리라. 그런 인류가 성인으로 꼽는 사람이 동서양 합해 고작 네 분이다. 그 정도 경지라면 상식적으로 그 분들은 분명 여색(女色)에서 자유로웠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어째서 성인은 모두 남자인 거냐고 따질 수 있겠다. 아마도 인류 역사가 남성 중심으로 흘러왔고 기술(記述)되었다는 점이 먼저 지적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뒤안에 남녀는 각기 ‘화성’과 ‘금성’에서 거주한다 알려진 저간(這間)의 연구 결과를 반영해 남녀의 성별 차이도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흔히들 남성 대상의 ‘열 여자 마다 않는다’는 속담이 있고 ‘치마만 두르면 여자’라는 말도 있다. 그러니까 남자들 아니 수컷의 특징 중 하나가 여러 이성에게 찝쩍거리려는 욕망이다. 진화의 오랜 과정 속에서 유전자에 각인된 특성이라고 연구서들은 말하고 있다.

여자는 그러면 욕망이 없는 존재냐고 말해서는 안 된다. 내가 공부한 바로는 다만 욕망의 성질과 정도가 다르다고 정리할 수 있다. 여자 중에도 열 남자 좋다는 사례 있을 수 있지만 그건 남성성이 강한 예외적인 여자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를 ‘늑대’ 또는 ‘짐승’이라고들 부르는 것 아닐까. 반면 남자들은 여자를 일러 ‘여우’라고 말하지 않는가. 같은 포유류 동물이지만 늑대가 욕망 일변도인 반면 여우에는 계산의 요소가 작용한다는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부분이 발견된다.

저속하게 말해서 남자들은 ‘문어다리’인 양 사귄 여자들의 숫자를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여자들은 바람을 필 때조차 일부종사(一夫從事)에 분위기를 찾는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남녀의 사귐에서도 ‘틀린’ 것은 없고 서로 ‘다른’ 것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을 때 남녀간의 관계는 훨씬 부드러울 수 있다. 이는 남자의 욕망이 가진 성격이 그러하니 그것을 허용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서로 다른 것을 인지(認知)하며 간통죄가 사라진 위기의 사회에서 조화의 길을 찾자는 말씀이다.

이성에 대한 남자들의 육체적 욕망이 얼마나 뿌리 깊고 강렬하기에 그러한 욕망을 정복하여 해탈한 성인인 부처님을 들먹이겠는가. 여자를 여자로 보지 않는 성인(聖人)조차를 의심할 만큼 보통 남자들의 성욕이란 강렬하다. 종이 한 장 들 힘만 있어도 여자를 바란다는 말은 공연히 나온 게 아니다.

이처럼 남녀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이해하고 인정하기만 해도 대화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 잡아먹을 듯이 서로의 잘못만을 들먹이던 태도가 훨씬 누그러진다. 거주 행성이 그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때 상대가 더욱 애틋해지기도 한다.

남자인 나 또한 게를 편드는 한 마리 가재에 불과하다. 나름으로 남녀 차이를 공부했기에 일반의 남자들보다 여자들로부터 여성을 조금 이해하는 축이라는 평을 받기는 한다. 그러나 나의 몸속에도 분명히 아직까진 ‘늑대’가 살고 있음을 숨길 도리(道理)가 없다.

그러기에 평범한 남성들은 부처님에게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어떻거나 남자인데 예쁜 여자 신도에게 눈길 정도는 ‘쬐끔’ 주시지 않았을까 실눈 뜨고 바라보는 심정이 된다. 그런 남자들의 심뽀가 담겨 ‘부처님조차 돌아앉을 카드’라는 말이 탄생된 것이리라.

젊은 프놈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