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칼럼] 뜨거운 것이 좋아

기사입력 : 2014년 0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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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에 부서지는 한낮의 태양빛이 뜨겁다. 이웃집 마당에서 껄렁하니 웃통을 벗은 중년 남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푸른빛이 돌 정도로 하얗게 세탁한 웃옷을 아낙 뺨치는 솜씨로 탈탈 털어 솔기를 야무지게 바로잡아 줄에 매단다. 빨래통을 덜렁거리며 그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열대스콜이 쏟아진다. 햇살을 받으며 바람에 한껏 너풀거리던 옷자락은 비에 흠뻑 젖어 버림받은 여자처럼 축 흘러내렸는데, 비설겆이를 서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남자의 여자는 어디 있을까? 그 사나이는 또 어떤 사랑의 역사를 지니고 있을까?

부부동반 모임에 나갔다가,“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남성축의 질문을 받았다.“사랑은 유치한 것이다”는 누군가의 견해를 덧붙여서. 경쟁에 치인 현대남성은 삼십도 되기 전에 ‘연애불구자’가 돼버린다는 풍문은 과장인가, 중장년의 신사들이“사랑”에 대해 묻다니, 놀랍기도 하고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더워졌다. 그러나 사랑이나 연애에 관한 얘기라면 배우자가 없는 자리에서 술이 얼근하여 처세막이 허술해졌을 때나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문학, 예술은 물론 우리네 삶에서 사랑만큼 논의가 많은 주제는 없으리라. 일찍이 스탕달은 저서‘연애론’에 사랑의 유형을 분류해 놓았다. 온갖 이해관계를 뛰어 넘는‘정열적인 사랑’, 온갖 이해관계에 순응하는 ‘취미적인 사랑’, 오로지 쾌락을 추구하는 ‘육체적인 사랑’, 오로지 얘깃거리를 만들기 위한 ‘허영적인 사랑’이 그것이다. 아직도 사랑은‘뜨거운 그 무엇’이어야 한다고 믿는 나로서는‘정열적인 사랑’에 가장 끌린다.‘유치함’과‘뜨거움’은 비슷한 동네의 어휘들일 테다. 반대로‘성숙함’에는 어느 정도의 ‘차가움’이 요구되는 것처럼. 사랑에서 유치함과 뜨거움이 사라지면 우정이니 연민이니 동정 같은 감정이 되지 않겠는가.

누구나 한번쯤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마련이다. 사랑을 느낄 때 뇌에서 분비되는 페닐에틸아민이 2,3년 후부터 양이 주는 탓에 열정의 유통기한이 3년에 불과하다는 게 인간사의 비극이지만. 그럼에도 이른바‘콩깍지 호르몬’의 장난을 거슬러‘뜨거움’을 끊임없이 진화시켜 가는 커플도 있다. 평생 잡아먹을 듯이 싸우면서도 걱정 어린 구박으로 세상추위를 녹이며 살아가는 노부부를 주변에서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오래 전에 본 영화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노는 계집 창娼”(임권택)에 집창촌을 찾는 사례를 다큐형식으로 꾸린 대목이 있다. 백발성성한 할아버지가 여자를 산다.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죽기 전에 회춘해 보라며 우리 할망구가 보내줘서 왔노라고 답변한다. 글을 쓰는 이가 뭔가를 인용할 때는 그 사안에 대해 동의하거나 반대하거나 둘 중 하나다. 황혼이혼이 청춘이혼을 넘어서는 시대, 한평생 해로한 이 할머니의‘뜨거운(?) 사랑’에 대한 평가는 독자에게 맡기기로 한다. / 나순 (건축사, http://blog.naver.com/na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