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역사탐방] 자야바르만 7세

기사입력 : 2014년 0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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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시대 최대의 번영을 가져왔던 가장 위대한 왕 자야바르만 7세는 왕의 적자가 아닌 왕가의 자손이었다. 그는 수리야바르만 2세의 이종 조카였고, 어머니 추다마니는 하르샤바르만 3세의 딸이었다. 모친의 부왕은 11세기 전반에 걸쳐 캄보디아를 지배한 왕의 후손이었으며, 모계의 가계도는 앙코르 이전기의 캄보디아를 통치한 고대 왕들과 혈연관계가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왕궁에서 봉사한 후 앙코르에서 다소 떨어진 깜뽕스와이에 있는 프레아 칸 사원의 인근 지역에서 지방장관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이 지역에서 장관직을 수행하는 동안에 내륙과 톤레삽 호수의 수로로 침입하는 참족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참족을 영토 밖으로 몰아내고 자신을 구세주로 칭하며 중앙의 무대로 등장하였다. 그가 축조한 사원의 벽에는 해전의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있다.

1178년 해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권을 장악하는데는 3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으로 보아 중앙의 정치적 갈등과 분열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183년 쯤에 이르러서야 자야바르만은 대체로 캄보디아 전역을 자신의 휘하에 두었다. 한 때 자야바르만 2세가 캄보디아의 통합을 이루어 앙코르 제국의 건설의 기반을 다져 놓았지만 그의 바로 직계 계승자들은 그 기반을 활용하여 더욱 발전시키지 못했고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하여 장대하고 찬란한 앙코르 문화와 제국 융성의 절정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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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세계관에 대해서 비문이 말해주는 것은 여러 분야에서의 급진적인 변화와 개혁이었다. 그의 시대에 건축되었던 많은 건축물들은 과거에 세워졌던 건축물들의 전체규모에 버금간다. 1203~1220년 사이 자야바르만 7세는 간헐적으로 캄보디아를 괴롭혔던 참파의 정벌에 나서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자신의 이복형제인 왕자 ‘인’을 참파족의 왕으로 두었다. 도로에 길목에는 많은 휴게소들이 설치되어있었다고 비문에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건설공사에 필요한 인력이 각 지역에서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시대에 특이한 점으로 102여개나 되는 진료소 혹은 병원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병원들은 체계적인 관리하에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병원은 도성과 지방에 세워졌다. 비문에 의하면 도성에 있는 병원은 일 년에 3씩 왕으로부터 의약품을 하사받았다고한다. 전국의 도로에 걸쳐 휴게소를 짓고 각 지역에 진료소를 세운 자상한 통치자로서 그는 고통받고있는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의 통치이념은 대승불교의 이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아마 그의 부친이나 참파와의 전투 중(당시 참파는 대승불교를 믿고있었다고 한다.)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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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야바르만 7세의 건축물로는 대표적으로 닉 핀, 프레아 칸, 타 프롬, 앙코르 톰, 바욘 사원 등이 있는데 그의 불교적 사상 또한 이 건축물들을 통해 볼 수 있다. 닉 핀 사원은 두 마리의 뱀이 얽혀 또아리 튼 모습으로 되어있으며 중앙에는 미륵불상이 있다. 타 프롬 사원은 자야바르만 7세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만든 사원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부처의 어머니의 형상으로 안치시켰다. 또한 프레아 칸 사원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만들었는데 이 사원에는 대부분 캄보디아의 고유 토지신을 모셨다. 바욘 사원은 자야바르만의 중앙 성전으로 수많은 얼굴상이 있는데 이 얼굴은 부처 또는 자야바르만 자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한다. 앙코르 톰은 거대한 도성과 같은 건축물인데 현재에는 그 안의 바욘 사원을 제외한 나머지 건축물들은 손실되었다. 자야바르만 7세 이후 앙코르 제국은 서서히 쇠퇴하였으며 후에도 그의 치세를 능가하는 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 글 : 박근태(왕립프놈펜대학 크메르어문학과 3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