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칼럼] 소, 소, 소

기사입력 : 2013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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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가 진짜 물속에서 사는 구나.” “들소는 들에서 살잖아!” “그럼 코뿔소는?” 캄보디아에는 소가 많다. 6번 국도를 따라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평화 그 자체였다. 팜나무와 열대 꽃구름의 연무, 연초록 벼이삭을 간질이는 햇살과 바람, 논두렁의 풀을 뜯는 흰소와 늪지에서 졸고 있는 물소… 어린 시절에는 소가 감나무 그늘 아래서 되새김질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반쯤은 눕고 눈도 반쯤 감은 누렁이 황소, 주먹만 한 풀 뭉치가 식도를 통과해 입으로 넘어오면 턱을 맷돌처럼 돌려 하릴없이 씹는다. 인간도 소처럼 반추동물이었다면 우리사회가 이렇듯 각박하고 치열해지지 않았을 성싶다. 너른 들판에 자고나면 무성해지는 “꼴” 한 소쿠리면 식사 끝, 한정된 먹이감을 두고 다투지 않아도 됐을 터이니. 근무 중에 갖는 휴식시간의 문화도 사뭇 간소하리라. 간식꺼리며 음료며 컵이며 부산떨 것도 없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슬슬 새김질이나 하면서, 증시나 환율 따위 대신 시와 음악에 대해 논하지 않을까. 어떤 문화비평가는 사람에게 다양한 요리를 즐기는 감각이 없었다면 인류문화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한다. 지구촌 이곳저곳의 산해진미를 찾아 모험, 경쟁, 사기, 전쟁도 불사하게 되면서 제반 문화가 파생되었다는 주장이다.

인도에서 암소의 존재는 대단하다. 유제품 공급과 농가의 트랙터 역할을 하는 수소 생산은 물론, 연간 수억 톤에 달하는 소똥은 건축 재료와 연료로 쓰이고 죽어서는 가죽을 제공한다. 인도 농부는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암소를 잡아먹지 않는다. 당장의 허기를 면하기 위해 무궁무진한 생산수단을 처분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소고기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마지막 한 방울의 우유까지 짜내기 위한 안전장치로 암소의 신격화가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한다. 힌두교 영향을 받았던 캄보디아도 소에 대한 배려가 상당하다. 그들에 따르면 소는 힘겨운 일을 묵묵히 해낼뿐더러 자신을 스스로 돌보는(사철 방목하므로) 동물이라 존중받는다고 한다. 사람처럼 존중받기를 원하는 동물도 없지만, 뼈를 깎는 자기희생이 따르지 않는 한 어림없는 까닭이리라.

“불도저(Bulldozer)”라는 말은 Bull(황소)과 Dozer(조는 사람)의 합성어로, 황소가 할 일을 빼앗아 황소를 꾸벅꾸벅 졸게 만든 기계라는 뜻이라고 한다. 불도저나 트랙터가 노동을 대신하고 있는 모습은 눈에 띄지 않으나 캄보디아 소 팔자는 하나같이 늘어져 보인다. 농기계가 대대적으로 보급되면 어쩔 수 없이 비육우 신세로 전락할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어디서나 어슬렁거리는 소 떼를 볼 수 있다. 혼잡한 시장 통을 헤집고 다니기도 하고, 차들이 쌩쌩 달리는 간선도로 한 복판으로 들어와 큰 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바야흐로 정부에서는 소로 인한 사고는 모두 소 주인에게 변상조치 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소유에는 권리뿐만 아니라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 캄보디아 축우농민들이여, 소 단속 잘 하시라. / 나순 (건축사, http://blog.naver.com/na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