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한인 선교사 이야기] 제 2 화 1958년, 캄보디아에서 복음을 전한 최찬영 선교사

기사입력 : 2020년 07월 08일

수천 년 동안 힌두교와 소승불교를 신봉해오는 캄보디아인들에게, 천주교나 개신교는 서양인들의 종교로 인식되기 쉽다. 그런 캄보디아에 지금부터 62년 전인 1958년, 해방 후 첫 한국인 선교사로서 태국에서 사역하던 최찬영 선교사는 23일간, 프놈펜, 깜뽓, 깜뽕짬, 끄라쩨, 깜뽕톰, 시엠립과 바탐방 등, 캄보디아의 7개 선교 구(區)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전도 집회를 인도하였다. 이는 최찬영 선교사, 한 개인으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한국인 선교사로서의 첫 캄보디아 방문, 1950년대~1960년대 캄보디아 개신교 상황 및 당시 캄보디아를 알 수 있다는 등, 여러 면에서 대단한 의미를 갖는 일이다.

799-1▲ 태국에 도착한 최찬영 선교사 부부(1956년)

최찬영 선교사는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 3대 믿음을 가진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며, 1953년 1월 24일, 고 김광명 간호사와 결혼하였다. 1955년 4월 24일, 영락교회(한경직 목사, 총회 선교부장)에서 대한민국 수립 이후 첫 선교사 파송 예배를 드린 후, 1956년 5월 24일, 태국 방콕으로 출발하였으며, 같은 해 7월 21일, 도착하였다. 파송 예배 후부터 출국까지 소요된 1년은 온전히 선교사 여권을 제작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에서 선교사를 대상으로 만든 첫 여권이었다.

태국에 도착하여 언어 연수를 마치고 막 사역을 시작한 1958년 2월 15일, 캄보디아 C&MA (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 선교회에서 보낸 ‘S.O.S. 2월 23일까지 캄보디아에 와서 일주일간 특별 집회를 인도해달라’는 내용의 전보를 받았다. 그런데 당시 최 선교사가 받은 여권은 태국에만 주재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가까스로 태국 영주권에 신원보증서를 발급받아 선교회와 약속한 2월 23일, 캄보디아 프놈펜에 도착하여, 영어 설교와 크마에 통역으로 은혜롭게 집회를 인도하였다. 프놈펜 집회를 마치고 나니 선교회 책임자들은 프놈펜뿐 아니라, 캄보디아의 여섯 곳 선교 구의 주요 도시를 방문하여 집회를 인도해달라고 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캄보디아에는 처음 예정한 일주일이 아니라 23일간 체류하게 되었다.

799-2▲ 최찬영 선교사 자서전(1995년)

1958년 당시 최찬영 선교사의 기록에 따르면, 캄보디아 전국에는 대학이나 전문대학이 없었기에 고등학교가 최고 교육기관이었으며, 캄보디아인 50명 중의 한 사람은 불교 승(僧)이 되었는데, 이는 태국보다 불교가 강한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인근 국가인 월남, 태국, 라오스 등에는 한교(韓僑, 교민)들이 더러 있는데, 캄보디아에는 한 사람도 없다고 들었다. 개신교 선교는 약 40년 전에 시작되었는데(천주교는 불란서 통치와 더불어 들어와 상당한 교세를 갖고 있다), 당시 사역하던 개신교 선교사는 20명이요, 기독교인 수는 약 400명이었다.

수도 프놈펜의 인구는 50만 명인데, 그중 기독교인은 25명 정도라고 들었다. 최찬영 선교사는 ‘이러한 전도 부흥 집회는 캄보디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는 안내자의 말에 따라 프놈펜 집회 참석자를 25명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첫날 프놈펜 집회에 100여 명이 참석했으며, 이 가운데 12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선교회 관계자들은, 지금까지 개인 전도만 하던 전도 방식에서 앞으로는 자주 이러한 집회를 가져야겠다고 평가했다.

깜뽕짬에서 끄라쩨에 갈 때는 작은 배를 탔는데, 무려 11시간 소요될 정도로 느린 배였다. 아침 9시에 출발했는데, 도착하니 밤 8시였다. 그곳에는 한국어는 물론, 영어, 태국어, 중국어 중에서 어느 말도 통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C&MA 소속 톰슨 (Thomson) 선교사를 만났는데, 그 가족은 후에 베트남으로 선교지 이동 후, 1968년 베트콩에 의해 순교하였다./장완익 선교사 (KMAC 역사연구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