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더 알아보기] 제22화 씨엠립의 유래와 캄보디아 근세의 역사

기사입력 : 2020년 01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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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0년대 동남아시아의 국가별 영향력 분포: 아유타야 왕국(Ayudhaya Kingdom)은 태국의 전신이며, 란상 왕국(Lan Sang)은 라오스의 전신이다. 란나 왕국(Lan Na)은 1775년 태국에 멸망했고, 참파 왕국(Champa)는 17세기말에 베트남에 멸망했다.

캄보디아 역사는 고대 푸난왕조(1세기-550년)와 쩬라왕조(6세기-802년), 중대 크메르제국(802년-1431년)과 암흑시대(1431년-1863년), 근대 프랑스 식민지 시대(1863년-1953년) 및 현대(1953년-)로 구분할 수 있다. 근세에 해당하는 암흑시대는 ‘Dark ages of Cambodia’를 편의상 번역했으며, 신격화된 왕권을 구축할 정도로 중세에는 위대했던 크메르제국이 근세에 들어서 중국 대륙으로부터 남하한 이민족의 침탈로 내륙의 주도권을 포기하고 해안으로 밀려난 이후에도 국력이 쇠퇴 일로에 치닫던 시기이다.

크메르제국은 전성기 때 인도차이나 반도의 주변국과 전투에서 일전일퇴를 주고받을 정도로 힘의 균형 내지는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크메르제국 최후의 전성기를 이끌던 자야바르만7세 왕(1181-1219) 사후에는 왕권 다툼으로 내분하면서 주변의 신흥 강국을 충분히 견제할 만큼 국력을 방비하지 못했다. 태국 왕실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시기 크메르왕국은 1350년, 1380년, 1418년 및 1431년에 태국 군대와 충돌했으며 이로 인해서 국토는 황폐화되고 국민들은 대거 태국에 포로로 끌려갔기 때문에 수도 앙코르는 무력화된 것으로 보인다.

크메르왕국은 태국의 잦은 침략을 방어할 수 없던 수도 앙코르를 포기하고 1434년에는 짝또목, 1529년에는 롱와엑으로 수도를 이전했다. 이렇게 앙코르를 포기한 이유에 대해서 학자들은 14, 15세기에 심각한 가뭄이 장기간 지속됨에 따라 앙코르가 도시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으로도 추측한다. 어쨋든 짝또목과 롱와엑 시대에 크메르왕국은 메콩 삼각주(메콩 델타)를 통해서 크메르 심장부, 태국 및 라오스 왕국의 하천 상거래를 통제하여 중국 해안, 남중국해 및 인도양을 연결하는 국제 무역 경로로서 활기를 띄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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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씨엠립’의 유래를 살펴보면 당시까지는 캄보디아가 태국의 본격적인 속국으로 전락하지 않았고 어느 정도는 대등한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씨엠립’은 ‘시암, 즉 태국을 격퇴하다’라는 의미이다. 1549년에 태국 왕실이 내부문제로 혼란한 틈을 타서 앙짠1세 왕(1516-1566)은 태국 땅을 침략했고 주민들을 노예로 데려왔다. 이에 태국은 침략자를 처단하고 국민들을 송환할 목적으로 왕자를 대장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앙짠1세 왕이 소총으로 태국 왕자를 쏴 죽이고 전쟁을 승리했는데, 이를 기념하고자 그 지역을 씨엠립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1583년 태국 왕실의 난세의 영웅 나레수안 왕자가 재건과 부흥을 이끌면서 캄보디아를 침략했고 마침내 1594년 롱와엑 왕궁은 박살이 났다. 이때 롱와엑에는 태국의 총독부가 설치되고 크메르왕국의 왕과 왕족들은 태국으로 끌려가서 굴종적이고 친태국적인 인사들로 변모한다. 그러나 앙짠2세 왕(1806-1834)은 이러한 경향에 반기를 들고 태국에서 볼모로 살때 교우하던 베트남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었다. 이때 크메르왕국의 영토였던 호치민의 지배권을 베트남에 넘겨 줌으로써 캄보디아가 메콩강 유역을 상실하는 단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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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캄보디아의 암흑시대 16세기 중반, 국제무역항으로서의 활기를 띄는 왓프놈의 모습

그리고 이때부터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 모두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의 길을 걷는다. 그런데 태국은 캄보디아와 공통된 종교, 신화, 문학, 문화를 공유했으며 많은 종교적, 문화적 관행을 채택한 데 반해서 당시 베트남 왕실의 민 망 황제(1820-1841)는 유교이념으로 무장한 관료층에 둘러싸여 캄보디아인을 문화적으로 열등하게 보고 영토 확대 및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문명화의 사명’에 몰두했다. 그래서 캄보디아 민족의 정체성을 뿌리채 흔들었고 이로 인해서 캄보디아 전역에서는 엄청난 반발과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unnamed▲ 앙두엉 왕(재위: 1840-1859): 1796년 우동에서 출생했으며 유년시절을 태국 왕실에서 교육 받아서 학문적인 조예가 깊고 청년시절에는 태국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로서 전장에서 승전보를 알렸다. 형님이었던 앙짠2세 왕의 후사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왕재가 있었던 앙두엉을 견제했던 친베트남계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태국으로 도망쳐서 살아야 했다.

당시 태국에 있던 앙두엉 왕(1840-1859)은 이런 민심을 이용해서 전쟁을 승리했지만 태국은 원조의 대가로 바탐방, 씨엠립, 씨소폰, 똔레뻐으, 멀루쁘레이, 껌뽕파에, 뜨랏 및 꺼꽁을, 베트남은 전쟁에서 물러나는 대가로 깜뿌찌아끄라옴의 절반을 뚝 떼어 갔다. 이후에야 캄보디아는 평화를 수복하고 국가를 재정비할 수 있었는데, 이때를 캄보디아 역사에서는 앙코르제국 시대에 비할 황금기로 표현한다. 그러나 태국에서 길러진 앙두엉 왕의 굴종적인 태도는 국운을 의탁할 외세를 찾았고 결국은 1863년에 캄보디아를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게 했다./왕립프놈펜대학교 한국어학과 이영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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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흑시대의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의 사냥감으로 전락했음을 통렬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다. 두 나라는 캄보디아를 돕는 척하면서 사실은 자신들의 이권을 탈취하기에 바빴다. 이러한 태도에 진저리가 났던 앙두엉 왕은 결국 유럽 열강의 식민지를 스스로 청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