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 칼럼] 연민

기사입력 : 2018년 03월 29일

거울 속에서 돌아가신 모친의 모습과 점점 닮아가는 얼굴을 마주할 때나, 티격태격 흉허물없이 지내던 옛 지기들이 그리울 때면, 물설고 낯선 이국땅에서 그 좋은 세월 많이도 허비했구나 싶어져 서글퍼지곤 한다. 나이 들어가면서 사회 불의나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각은 둔해지는 반면 자기연민과 같이 추레한 감정은 더해가는 듯싶다.

옛 지인 중에 가진 것 없이 결혼하여 군색한 형편 때문에 걸핏하면 부부싸움을 하던 여인이 있었다. 하루는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다투다가 불똥을 피하려던 남편이 휙 돌아눕는다는 것이, 신혼방이 워낙 비좁다 보니 코를 벽에 찧어 코피가 터지고 말았다. 가난도 서러운데 구박까지, 코피를 싸매주며 한참 울었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잘 사는 부모덕을 본 친구들보다 많은 부를 일구었는데 그간의 사연이 구구절절 감동적이었다. 남편에 대한 연민이 잠자던 생활력을 발동시킨 모양이다. 사람은 대체로 어려운 상황에서 더 많은 것들을 해낸다고 한다. 빈곤이나 위기 때뿐만 아니라 신체적 장애 같은 약점이 때로는 더욱 분발하게 하는 삶의 동력이 된다는 의미일 테다.

얼마 전 음악가의 삶을 다룬 영화 ‘마지막 4중주(A Late Quartet)’를 보았다. 세계적인 4중주단이 결성 25주년 기념공연을 앞두고 있는데 멤버 중 가장 고령인 스승이 파킨슨병 판정을 받으면서 단원들은 충격과 혼란에 빠진다. 스승과 제자, 부부, 옛 연인, 친구, 내밀한 관계로 엮여있는 네 사람은 오랫동안 숨기고 억눌러온 감정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25년 내내 제2 바이올린만 켰던 남편이 이 시점에서 메인인 제1 바이올린 연주를 맡아 자신의 음악 세계를 펼치고 싶다며 아내의 지지를 구한다. “그건 당신의 에고라고, 제기랄!” 비올리스트인 아내는 각자의 재능과 실력에 따라 공정하게 움직여 온 게 우리 팀의 강점이었다며 완강하게 거부한다. 어느 분야나 비슷하겠지만 특히 예술계에서 ‘천재적인 사람’과 ‘욕망이 간절한 사람’ 간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 비극이다. 남편에 대한 연민 따위로 예술성에 흠집을 낼 수 없다는 프로의식이 25년 동안 세계 톱의 권위를 고수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나 싶은 대목이었다.

사람이 애처로운 감정을 느낄 때 가장 순수하다. 타인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애정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살이의 근간일 테다. 세계 곳곳의 원조와 봉사의 손길이 끊이지 않는 캄보디아는 최고 인류애 수혜국인 셈이다. 오랜 시간 도움을 받다 보니 도움이 당연한 상황이 되고 점점 타성에 빠지는 듯해서 안타깝기도 하다. 물자 귀한 줄 모르고 원조에 조건을 다는 가하면 봉사활동 대신 현금을 요구하는 일도 다반사다.

생텍쥐페리는 거지에 대한 연민으로 피부병을 치료해 주었는데 말끔한 거지에게 적선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거지가 돌아서자마자 제 몸을 해코지하는 장면을 보고 깨달은 바가 많았다고 한다. 자신의 기준이 곧 선일 것이라는 연민, 베푸는 즐거움으로 끝나버리는 연민, 연민에서 우러난 행동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을 테지만 그르치지 않게 행하기란 쉽지 않을 듯싶다. /나순(건축사, UDD건설 naarc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