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행복 연습

기사입력 : 2016년 07월 30일

행복연습1

고등학교 남학생들에게 여자 사귈 때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고 가르치면 꼭 그런 학생들이 있다. “선생님은 예쁜 여자 안 좋아하세요?”라고 질문하는 녀석들 말이다. 엄청나게 유치한 물음이지만 답하자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아닌 다음에야 미인이 싫을 이유는 없다.
조선 중종 때 학자 최세진은 한글 자음을 이름 지을 때 ‘으’ 밑에 그 자음을 넣어 부르도록 했다. 그런데 ‘ㄱ·ㄷ·ㅅ’은 해당 음을 표기할 한자가 없어 ‘기역·디귿·시옷’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최세진 명명법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북한은 작명 의도를 중시하여 ‘기윽·디읃·시읏’이라고 바꿔 부른다. 원칙의 정신에 입각한다면 그렇게 통일하여 주는 것이 낫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앞뒤 맥락을 제하고 북한을 더 우월하다고 했으니 종북주의자라고 몰아붙인다면 어찌 될까. 위의 고교생 유치함을 찜쪄먹을 수준 낮은 이분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자’라고 제딴엔 겸손을 떤 고위공직자가 있었던가. 혹시 그를 부러워하거나 그의 신분에 못 미친다고 자신을 부끄러워한 분이 있으실까. 그러나 1%도 부러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마시라’. 나 또한 철부지 시절 금수저가 잠깐 부러웠던 순간도 있었지만 흙수저 출신으로 현재 모습까지 성장한 나로서는 자칭 고귀하다는 그들이 가엾다. 그리고 그렇게 되길 원한다면 ‘노∼오력’을 하라고 몰아대는 것도 ‘웃프다’. 그들 고귀함의 잣대라는 것도 우습거니와 된사람의 기준은 재력도 신분도 아닌 교양과 행복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소 짓는 캄보디아를 배우자 이야기하면 비슷한 상황 발생할 수 있다. 우리가 캄보디아처럼 살자는 것이냐고 정색(正色)하며 부르대는 윤똑독이들을 만날 때가 종종 있어서다. 더없이 팍팍할지라도 일단 행복할 수 있자는 말이지 캄보디아가 되자는 얘기가 아니지 않은가.
‘고시 패스 한방’으로 고위공무원이 된 자들 중 이런 류(類)가 많다는 주장들이 있다. 내 보기엔 시험 합격 여부보단 너무도 승승장구하여 실패를 모르는 부류가 그러지 싶다. 그러나 이 또한 ‘케바케’일 뿐이다. 부디 소수이길 바라는 이런 자들 대부분은 자기 우물에 갇혀 그 외의 시각은 몽땅 잘못이라 구분하는 못난이들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을 부러워하지 않으면 위선이라 간주하는 것이니 이 얼마나 유치한가. 여기 속하는 속소위(俗所謂) 고위층은 그들만의 세상에 사는 ‘내부자들’일 터인데 일테면 인간들 속에서 짐승 같은 해악을 저질러 놓고도 그 의미를 모르는 검사장이나 민정수석이나 대기업 총수 같은 분들이겠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들 생각과 행동이 쪽팔린 줄 모르면 불쌍한 거’라고 알려주고 싶은 거다.
그 정도 수준의 인간들이 다스리는 ‘헬조선’에서 어떻게 웃을 수 있냐 물을 때 나는 답하리라. 지옥을 살면서도 웃음 간직했던 캄보디아인들을 따라 행복의 미소를 머금으시라고 말이다. 그리고 흔하게 들었던 ‘행복해서 웃기보다 웃으니 행복하다’는 명제(命題)는 불가능한 역설(逆說)이 아님을 알아 함께 연습하자고 덧붙여야 한다.

케임브리지 대학 선정 세계 4대 생불의 공통점은 무얼까. 그분들은 현대사에 기록된 최악의 내전과 살육을 경험했으되 거기서 대자비의 연꽃을 피웠다. 나아가 그 사랑을 세계로 회향(回向)하여 인류와 더불어 행복할 대평화심을 이상 삼고 실천하신 큰 걸음을 남기셨다.
그 중 열반하신 두 분 숭산 스님과 고사난다 스님에 대해선 간단히 알려 드린 적이 있다. 나머지 분들 중 달라이 라마야 워낙 알려져 있으니 여기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 남은 한 분은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으로 예서 짧게만 소개(紹介)드리려 한다.
로마자를 그들 문자 삼은 베트남이 본래 한자 문화권이었다는 사실은 잊혀지기 쉽다. 그것을 일깨울 겸 스님의 이름을 한자로 재구(再構)하여 적으면 석일행(釋一行)이 된다. 대개 뛰어난 인물들은 자신들 언행을 조그맣게 드러내는 바 그러한 경향과 일맥상통하는 법명(法名)이다. 그 정신을 거울삼아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소 조건인 ‘일행’을 규정한다면 ‘교양 갖추며 행복하기’이다.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면 견물생심(見物生心)한 묘공(猫公)께서 생선을 그냥 둘 리 없다. 그러니 젊고 아리따운 여성이 노출 심한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선 것은 잘못 아닐까. 하지만 여기서 간과(看過)해선 안 되는 점은 인간은 고양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견물(見物)하여 생심(生心)한 것은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라도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다음으로 필동(必動)하여 욕구대로 행동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필부동(必不動), 욕구를 억누르라는 것도 아니다. 즉 욕구를 따르거나 억누르는 두 가지의 극단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도 범부(凡夫)의 저차원 이분법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하여 그분들의 경지를 위선이라 몰아붙인다면 얼마나 ‘웃픈’ 이야기일 것인가.
색욕을 모조리 부정한다면 인류는 진작에 절멸했으리라. 역으로 그것을 무한정 허용한다면 인간은 동물 수준이 되어 문명을 건설하진 못했을 것이다. 욕망을 가려 선별하여 실현하거나 억제하는 것을 우리는 지혜(智慧)라고 부를 수 있으니 대략 ‘퉁쳐서’ 70% 인류는 그럴 능력이 넉넉히 갖춰져 있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모두가 행복한 그 경지는 연습하면 인간 탈 쓴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예수님도 부처님도 증명하여 주셨다 나는 확신한다.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뜻 살려 ‘웃으면 복이 와요’ 제목의 프로그램이 있었다.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하고 행복은 더불어 웃을 수 있어야 온다. 이것은 웃을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의 모든 부조리를 그대로 두라는 의미가 아니다.
지구마을 최악 수준의 양극화 극단을 달리는 한국 ‘개돼지’들의 오늘날 울분(鬱憤)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극히 당연한 울분에서 먼저 억울 느낌을 빼어내 웃음으로 풀어 날리시라. 분노는 남기되 공분(公憤)으로 바꾸어 간직하시라. 나는 공분을 ‘웃으며 사회 개혁에 나서는 일’로 정의(定意)하는데 그때 필요한 환한 웃음을 배우기 최적의 나라가 캄보디아라 믿는다. 그런 시각에 의하면 삶다움을 구분하는 기준은 ‘금수저 흙수저’도 ‘1% 99%’도 아니다. ‘교양 있는 인간으로서 행복한가 아닌가’가 의미있는 유일한 기준이다. 웃음은 동물 넘어선 인간만의 요소라고 한다. 웃음 머금은 행복한 된사람은 금수저들의 ‘저질천국’을 절대 부러워하지 않는다.
오늘날 대한민국 양극화의 책임 대부분이 정부와 고위공직자들에게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그들 변화를 요구하는 건 일견 타당하지만 그 정부를 구성한 건 국민들임도 기억하자. 그러니 정부가 바뀌어야 한다는 큰 틀의 요구는 우리 스스로 선거를 통해 바꾸어야 한다. 거기 더해 개인이 당장 해야할 몫 또한 각성해야만 한다. 내가 우려하는 건 망국적 과외 현상처럼 한국의 흐름을 나름 분석하며 감지하게 되는, 상당수의 국민들이 1%를 비판하는 척하되 실은 자신만의 편입을 도모한다는 점이다. 만일 그런 흐름이 대세(大勢)가 되면 그건 그들과 공범 되는 길이어서 개혁은 물 건너간다. 따라서 내가 가진 개인 차원 개혁의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자신이 고참 되면 쫄병 시절의 부조리를 기필코 고치리라던 군대 시절 다짐만 기억하면 된다. 부러웠던 ‘고참의 기득권’이 ‘1% 찌질이들의 천국’일 뿐 ‘70% 인간의 길’이 아님을 화로에 덴 듯 깨달아 부러움 내던져버려야 한다. 해맑은 캄보디아 미소를 배우며 ‘1분 행복 연습’하는 일은 된사람의 토대를 굳건히 하는 지름길임을 ‘도장 쾅’ 찍어 여기 보증한다./한유일(교사, shiningday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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