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힘 정의 종천순일

기사입력 : 2016년 03월 16일

평범한 사람들의 하늘 (1)

무언가를 아무런 비판 없이 맹목적으로 좇는 태도나 경향을 추수(追隨)라 한다. 예컨대 ‘현실추수주의’ 식으로 부정적 의미를 담을 때 많이 사용한다. 현실을 무조건 인정하고 굴복하며 그를 통해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는 자들을 비판하고자 사용하는 것이다.
대부분 이런 인사들은 ‘권력 곧 정의’만 받들 뿐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힘을 가진 세력을 알아채는 예리한 감각을 본능적으로 갖고 있다. 자신보다 힘센 위에겐 철저히 영합하지만 저보다 약하다고 판단된 아래는 냉정하게 외면하고 유린하는 게 그들의 또다른 특징이다.
삼월 접어들며 본색을 드러낸 날씨는 낮 되면 가볍게 38∘선을 넘나든다. 아침이라고 약하지 않은 불볕을 피해 그늘로 들어서니 습도 낮은 건기여서 견딜만하다. 그 덕에 이 나라 최고 지성의 전당 왕립 프놈펜 대학교 교정을 거니는 오전 행보는 꽃향기 산들바람 더불어 싱그러웁다. ‘열대의 현실’을 나 역시 추수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더위를 다스려 현실을 넘어서는 지혜로운 새로운 길을 찾아낸 것일까.

나라 세운 년도가 1948이란 주장에 근거하면 ‘건국 이후’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이가 있다. 한국어를 다루는 최상의 솜씨라는 문단 평가에 나 역시 상당 부분 동의한다. 교과서에도 몇 실렸던 그의 대표작들 중 하나쯤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분들이라면 대개 알고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고 일본에 충성하라는 내용의 시도 여럿 썼다. 그러나 그것은 ‘건국 이전’의 행동이어서인지 반성도 뉘우침도 후회도 없었다. 슬그머니 ‘한국인 코스프레’ 하더니 어느덧 조선 정서 회복하여 민족시인 경지까지 올라선 모양새다. 그러니 솜씨나 조작된 존경심, 학벌 또는 재력은 사람인가 아닌가의 판단 기준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오히려 사랑의 콩 반쪽이나마 이웃과 나눌 줄 아는 배려 여부가 훌륭한 척도(尺度) 아닐까.
최소한의 참회(慙悔)라도 하라는 요구에 자신은 친일도 부일도 한 적이 없다 했다. 자신의 행동을 굳이 해명하자면 종천순일이란다.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 대가(大家)답게 이런 고백을 변명이랍시고 남기기도 했다.

조선인이 종천(從天)하여 순일(順日)하면 일본인으로 개조 가능한가. 조선의 개는 일본인 주인에게 팔려가면 개 팔자를 따라서[從天] 일본 주인을 따를[順日]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짐승의 일이지 인간의 도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 ‘암살’의 ‘강인국’은 적극적 친일을 통해 일본인이 되고자 하지만 일인들에게 그는 그저 ‘말 잘 듣는 조센징’일 뿐이다. 그러니까 짐승에서 인간으로 진화한 존재로서 다시 짐승으로 퇴화하지 않는 한 ‘친일’은 친일일 뿐 ‘정당한 종천순일의 행동’이 되지 못한다. 시의 형식을 빌어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강권한 것이 종천이라면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르며 ‘한 점 부끄럼’ 없고자 한 어떤 시인의 몸부림은 역천(逆天)이 되는 것인가.
같은 맥락을 따르자면 ‘귀향’의 소재가 된 노리개 소녀들은 하늘을 거역한 무리가 된다. 식민지 백성으로 본국의 군대에 얹혀 전장(戰場)까지 간 이상 그들을 따라서 옥쇄(玉碎)하는 게 ‘종천스럽다’는 망언까지 뇌까릴 수도 있을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는 논리에 맞는 언어의 형식을 빌고 있을 뿐 하늘을 빙자해 최소한의 사람이려는 몸짓조차를 무참히 짓밟는 무도(無道)의 언사(言辭)이다.

바야흐로 총선이 다가오면서 선량한 국민들의 뜻을 받들겠다는 인간들이 넘쳐난다. 정치인들의 거짓에 이골이 난 우리들은 4월 13일이 되면 자칫 ‘그 놈이 그 놈’ 하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다. 그러나 위의 필자 생각이 그럴듯하다 느끼셨다면 이번만큼은 눈을 부릅뜨고 구별해주셨으면 좋겠다. 출마자가 일말(一抹)의 주저도 없이 ‘힘 곧 정의’를 부르대며 ‘종천의 순리’대로 행동할 자인지 사람의 길을 걷고자 고민(苦悶)하는 자인지를 지켜보자. 의지(意志)를 모아 유심히 보면 그 정도는 알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비록 비슷한 ‘놈’들일망정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젊은 독자들은 반드시 그와 같은 공부를 해주길 권한다. 그래야 ‘헬조선’이 ‘조선천국’으로 바뀌는 기적이 현실이 된다.
한편 누군가를 탓하기에 앞서 내면을 향해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진지하게 물어보자. 종교에 상관없이 형식에도 관계없이 하루 5분 조용히 앉아 나는 현실추수의 무리인가 아닌가 짚어보자. 5분이 정말 견디기 힘들다면 1분이라도 시간을 내보자. 내 안에서 먼저 걸러진 비판이 아니라면 비난이기 쉽고 비난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무엇보다 ‘나’가 달라지지 않는 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대한 바뀜은 ‘1분의 성찰’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귀향’의 감독은 14년의 시간을 바쳐 인간은 왜 개처럼 힘에 굴복하지 못하고 ‘사람의 길’을 고민하는가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대다수가 쉬쉬하며 피하는 ‘현실’에 맞서서 추수가 정의일 수는 없다고 온몸 바쳐 우리에게 전한다. 그 주제에 진정으로 공감한다면 관람으로 그쳐서는 부족하니 매일의 삶에서 성찰로 이어지고 같은 뜻 가진 사람들과 연대로 연결되어야 투표의 현장에서 기적을 연출할 수 있으리라.

따라서 오늘 우리는 선택하여야 한다. 힘이 있는 자에게 무조건 순종하고 나머지에게 악마가 되는 소위 ‘종천’의 길을 갈 것인지 ‘귀향’이나 ‘동주’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사람’의 길을 갈 것인지를 말이다. 더욱이 위의 영화들을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린 분들이라면 하루 1분 내면 탐색으로 사람다운 길을 체화(體化)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람의 별’이 ‘요설(妖說)의 바람’에 스치우는 참으로 요상스런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나들’이 깨어있는 수밖에는 없다. 일례로 마약 같은 종편의 편향 방송에 넋 놓고 동조함을 멈추고 내 안의 뜰에 건강한 생각의 쉼터를 일궈야 한다.
편파 방송은 재미삼아 보고 생각은 정상으로 하여 바르게 선택하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상 벗어나 마약에 중독된 사람은 자신의 위험을 모른다. 그러한 무지는 ‘종천부일부류’가 바라는 고민 없는 짐승의 길이다. 중독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끊고 그 자리에 내 머리로 하는 ‘생각’을 돌려주는 것이다. 다수인 우리가 선택의 아름다운 권리를 한줌 ‘힘추수주의자들’에게 내어준다면 헬조선을 벗어날 방법은 요원(遼遠)하지 싶다./ 한유일(교사 ; shiningday1@naver.com)

 

세차장 동자승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