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BBS

기사입력 : 2015년 10월 16일

한글 중심길 (1)

우리 추석에 버금갈 정도로 민족의 대이동이 벌어지는 프춤번 연휴가 끝났다. 양력으로는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의 사흘이 휴일이고 그 가운데 12일이 음력 8월 그믐인 프춤번 날이다. 그러나 전통에 따르면 사흘보다 훨씬 길어서 캄보디아 사람들은 보름 다음날부터 프춤번까지 15일을 기념하며 그 기간 중에 7번 절을 방문하여 조상들을 기리면 좋다고 말한다. 특이한 점은 선조들을 위함에 있어 가장 어두워 상처 받은 영혼들이 다니기 편한 그믐을 핵심 명절로 삼는 것이다. 축복을 바라기보다는 피해를 주시지 말라는 뜻이 강하다는 설명인데 기나긴 핍박의 역사가 반영된, 유사한 예를 찾기 힘든 독특한 문화인 듯해 가슴 아리다. 그러나 추원보본(追遠報本)의 근본 뜻이야 동일하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한식당을 비롯한 많은 식당들이 문을 닫아 교민들도 대거 해외여행을 나서는 때이지만 우리는 프놈펜을 지키며 헐렁해진 시내 도로를 질주하기도 하면서 간만의 한가함을 만끽하였다.

한국 추석에서 캄보디아 프춤번으로 이어지는 명절 기분에 맞추어 자칫 무료하고 나른하게 흐르기 쉬운 프놈펜 생활에 활력소 하나를 마련하였다. 마침 그 기간 중 하루였던 반포 569돌을 맞은 한글날 저녁 신흥 주거단지 뚤꼭 어느 마당에서 공부 모임을 만든 것이다. 모임의 이름은 바로 글의 제목이기도 한데 외국에 거주하다 보니 영문 이니셜로 구성하게 되어 세종대왕께 약간 죄송했다.

그러나 실은 영어만도 아니고 ‘부디스트 백수’의 앞 문자들을 퓨전으로 조합한 것이다. 공통점 찾아 인연줄로 얽다 보니 ‘부디즘’ 앞세웠지만 멤버가 꼭 불자여야 하는 것도 아니니 종교 성향보다는 그냥 ‘백수’만을 드러내기 멋쩍은 측면이 더 강하다. 놀되 마냥 놀기보다는 이왕이면 지구마을 널리 통용되는 언어인 영어 공부를 좀 하면서 놀자는 게 결성 취지의 전부다. 마침 이날은 미친 듯 연소(燃燒)되기 좋아하는 한국인의 ‘불금’이었다. 교민분의 음식점에서 치맥을 벌여 놓고 그렇게 일행은 애들처럼 철없이 즐거웠다. 기실 상황이야 한국이든 이곳이든 팍팍하고 막막하다는 사람들 천지라 이렇게라도 기분을 좀 내보았을 따름이다.

 

한글에 대해서는 옛부터 있던 가림토 문자가 기원이라는 설도 있고 집현전 학사들 작품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러니까 세종대왕 개인의 공이 지나치게 부각되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어느 만큼의 타당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되 그것과는 별개로 한글이 우수한 문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그분이 왕이 아니었더라면 ‘훈민정음’이 반포되는 일은 매우 어려웠을 것임을 우리는 안다. 세자였음에도 임금 자리가 싫은 양녕대군의 양보와 주도로 본의(本意)와 다르게 보위(寶位)에 오르게 되었다는 게 세종의 즉위와 관련해 내가 짐작하는 유력한 내용이다. 하지만 필부(匹夫)의 입장에서 편리하기 이를 데 없는 한글 탄생을 중심에 놓고 보자면 그 사건은 얼마나 절묘한 역사인가 말이다.

지구에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건 풀길 없는 기적이라고 한다. 태양과의 거리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가깝거나 멀다면 뜨거움과 차가움의 정도가 엄청나게 달라진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자전, 공전, 대기 등의 조건을 더하면 그 신묘함이란 천의무봉(天衣無縫)이란 게다.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것까지를 포함해 인류의 문자는 대략 300여 개에 불과하다는 내용이 있다. 세계인들은 그 문자들이 하나같이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를 알지 못하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그런데 오로지 대한민국 공용어(公用語)의 문자만은 만든 분과 반포 시기가 정확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날 사용되는 한글은 세종대왕 당시의 것과 다르기도 하고 발전한 부분도 많다. 떠오르는 대로만 꼽아도 최세진이나 주시경 같은 분들의 노력이 더해져 더욱 편리한 문자가 된 것이다. 문제는 그런 위대한 문자를 우리 후손들은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가이다.

오늘날 지구촌 수많은 나라들 중 청년들의 자살률 최고의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문자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푸대접하듯 우주적 가치의 생명 또한 안타깝게도 그렇게 홀대(忽待)하는 것이다. 좀 엉뚱하다 싶을 수 있으나 한글날을 맞아 한글의 가치를 그에 맞게 아는 것을 계기로 자신 생명 역시 존중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싶다. 반포 기록을 근거로 국경일을 삼아 하루를 쉴 수 있는 유일한 국민의 자긍(自矜) 더해 단순히 노는 날 그치기보다는 조금은 철학적으로 성찰하는 날이기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그래서 가져보았다.

 

한반도 반만년 넘는 우리 역사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지구촌 거의 유일의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것도 기록할 만한 업적이다. 기념비적인 게 광복에 이은 한국전쟁의 피폐함 속에서 도움 받던 수원국이 연간 수천 명의 해외봉사단을 파견하는 명실상부한 원조 공여국이 되었다는 사실인데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이런 변전(變轉)은 앞으로 지구 인류사에서 다시는 등장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나는 생각한다. 이쯤 되면 요즘 양극화로 인해 ‘헬조선’의 오명까지 뒤집어쓴 나의 조국이 어떤 면에서는 꽤 멋진 나라라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박(薄)한 주장을 근거하면 단군조선 이전의 기록들은 역사가에 따라 전설로 보기도 하므로 차치(且置)한다 치자. 고조선 이후 역사로만 따져도 독립된 나라를 이룬 우리 역사는 어림잡아 오천년이다. 그러니 개미 발톱만한 식민의 시대는 최근 일이어서 벗기 힘든 기억이긴 해도 유구(悠久)한 한민족의 자존심을 꺾을 정도는 못 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계 역사에 드문 거국적 저항의 3∙1만세운동과 중국에 망명하여 장제스를 감동시켰던 임시정부를 주축으로 하는 치열한 독립운동이다. 세계사의 흐름을 타지 못하여 우리 힘으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하여 그분들의 공이 사라지거나 약해지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비록 분단되었어도 그 남쪽만 가지고도 선조들은 경제 대국을 만들었고 영국 어느 기자의 조롱을 뒤집어 ‘쓰레기통의 장미’에 비견된 민주화도 이룩해내었다.

 

하지만 새천년 한국 청년들은 삼포 오포를 넘어 ‘칠포’의 ‘헬조선’을 살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진 자 위주의 기성세대의 잘못이며 뼈를 깎는 그들의 자성이 우선되어야 함은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렇더라도 청년 당사자들의 ‘삶’ 포기는 절대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떤 스님 한 분은 오로지 당신의 원력 하나만으로 통일을 발원하고 의병 조직까지를 해내었다. 안으로 원망이 하늘을 찌르다 자해의 막다른 방법을 선택하고, 밖으로 방향을 못 찾아 죽을 각오를 하고 IS에 가담하기까지 하는 청춘들의 백태(百態)는 너무도 안쓰러운 2015 한국의 이지러진 그림들이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 앞에는 산업화 선배도 민주화 선배도 해내지 못한 통일의 숭고한 할 일이 있으니 그만하면 한번 큰웃음 물고 살아볼 만하지 않겠는가.

웃자고 덧붙이자면 캄보디아에서 처음 발견한 BBS(Bassac Barber Shop)는 바삭 강변 부근 이발소였다. 한글날 시동을 건 치기 어린 모임 이름 BBS에는 밝은 얼굴로 살고픈, 웃음의 힘을 빌려 팍팍한 일상을 넘어서려는 애잔한 유머를 담았다. 물론 대한민국에서라면 BBS가 Buddhist Broadcasting System[불교방송]의 약칭이라는 건 많은 분들이 아시는 바대로이다.

/ 한유일(교사 , shiningday1@naver.com)

바삭 이발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