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우리가 잘 살아야 하는 이유

기사입력 : 2015년 10월 16일

왕립대학교 교정의 한 풍광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캄보디아인들 대다수가 좋아하는 종교에서 비롯된 용어이지만 이는 종교와 무관하게 유용하다. ‘나’라고 하는 한 개인은 무엇 때문에 이 지구별에 존재하고 있는가. 어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이든 자신 마음이 하라는 대로 따라 살게 되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닌가.
때로 어떤이는 그 마음까지를 유일신께서 만들어주신 것이라 믿을 수 있다. 그들 믿음의 경전에서조차 그러나 판단의 주체가 인간 마음일 것을 요구한다. 스스로 돕는 자 되어 온전히 제 마음 그루터기 삼아 판단하기를 바라는 취지로 읽힌다. 생각만큼 순교(殉敎)가 쉽지 않은 것도 그래서이다. 평소에 아무리 강렬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목숨까지를 요구받을 때 마음으로 그것을 수용하기는 어렵다. 천만번 잘못된 판단이긴 하지만 IS 테러범의 망나니짓도 해당자에게는 범상치 않은 심적 결정이라 마냥 하찮게 볼 수만은 없다.

소설 통해 알려진 인물들 중에서 제갈공명보다 유명한 캐릭터 찾아내기도 만만치 않다. 신통에 가까운 능력으로 동아시아 삼국에 수많은 팬들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아마도 역사 속 실존보다 엄청나게 부풀려진 것이리라 추정된다.
그런데 내가 그에게서 주목하고 싶은 점은 신통력보다는 이런 면이다. 한자 성어로도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사건으로 자신의 최측근을 법대로 처형한 이야기 말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도저히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공명정대(公明正大)를 구현하기 위해서 내린 결단이었다.
물론 그것은 소설에서 미화(美化)된 측면일 수 있다. 또한 역사 속에 비슷하게 실현되었다 하더라도 정치적인 쇼에 불과하다고 폄하(貶下)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리더로서 사적인 호불호를 넘어 공적 가치를 지향하는 일이 묻건대 보통의 우리에게 쉬운 일인가.

사정을 호소하고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일을 탄원(歎願)이라고 한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피치 못할 상황이 있거나 개전(改悛)의 정이 뚜렷할 때 주변의 사람들은 탄원서를 제출하여 선처를 호소한다. 헌데 이기(利己)의 그물을 벗어나 온전히 개념 그대로만 사용되는 탄원의 미심(美心)을 당신은 본 적이 있는가.
행여 돈과 권력을 지닌 사람이 자신 주변 범죄자를 풀어주려 이용하는 경우는 어떤가. 별로 잘못을 뉘우치지도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데도 죄를 감면(減免) 받는 사례들 말이다. 혹여라도 그런 ‘유력무죄(有力無罪)’ 뗑깡에 종교인들이 들러리선다면 자신들 교조(敎祖)를 매우 부끄럽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어찌 범인(凡人)을 제갈량 급에 비교하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은 민주적인 시대인 현대를 사는 우리는 한 표의 권리상으로는 대통령과도 맞먹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 무게에 걸맞는 사회적 행위에도 생각이 미쳐야 하지 않을까.

자본을 모으는 게 정상을 넘어 추앙을 받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자신과 일가만 잘 살겠다고 일제에 빌붙어 재산을 형성한 자들까지를 정당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그런 친일 분자를 탄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악플이 일상화한 밥맛 떨어지는 시대라지만 선플 달기 운동도 벌어져 입맛을 살아나게 하기도 한다. 댓글이란 이렇게 어떻게 다는가에 따라서 선명하게 효용이 갈라진다. 평범한 우리인 그대는 공명을 닮으려는가 ‘댓글알바’로 양심 옥죄는 푼돈 벌며 사회의 올바른 대의(大義) 형성을 어그러뜨리는 세력이 되려는가.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앗으려는 자들[원수]에게까지 사랑을 베푸셨다. 오늘날 그분을 따른다는 교인들은 진정 그분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헤아려보고 있는가. 그렇다면 일부 광신도들 행태에서 보듯 예수님 이름 걸고 사랑 대신 미움의 전파 위해 자신들 정력을 쏟아붓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을 자칫 개신교를 비판하려는 의도라고 읽었다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해야 한다. 예수님을 언급했기에 주로 개신교 위주로 적었을 뿐 종교를 불문하고 배타적 광신의 행동 보일 때는 예외없이 비난 받아야지 개신교만을 나무라선 안 된다.

고슴도치도 자신의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 했다. 그럼에도 세계적 명성 지닌 어떤 영화배우는 마약사범인 자신의 자식에게 탄원 대신 오히려 처벌을 요청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님을 인간인 우리는 알지 않는가. 개신교에서 자주 쓰는 전도(傳道)나 장로(長老) 같은 용어가 불교에서 건너왔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그러니 그 용어들을 돌려달라거나 가져가라는 식의 수준 아닌 분들이라면 한 사람의 ‘값’은 믿음 순도(純度)를 떠나 오로지 사랑의 실천을 근거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도 쉬이 알 수 있으리라. 요컨대 말이며 장식(裝飾)이며 평판(評判)이 무슨 소용인가 사랑과 자비가 실천되지 않는 현장이라면!
노래 한 구절처럼 ‘내 마음 나도 모르게’ 사는 게 우리네 삶 아닌가. 그러니 남 잘못 긁어대기보다 나의 마음밭을 경작하여 나를 이기는 농사(農事)에 먼저 나설 일이다. 인류는 그런 분들을 성현이라 부르는 바 그러기에 극기(克己)는 위대한 우주적 승리인 것이다./ 한유일(교사, shiningday1@naver.com)

 

프놈펜에 착륙하려는 비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