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전체가 울었다

기사입력 : 2012년 11월 07일

10월15일 시아누크 전 캄보디아 국왕이 타계했다. 그는 참화로 얼룩진 캄보디아의 비극을 막기위해 엄정 중립의 길을 걸었다.캄보디아 국민들에게 그는 유일  하게 의지할 수 있는 지도자였 다.

지난 10월15일 89세 나이로 타계한 전 캄보디아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는 캄보디아의 현대사였다. 중국에서 사망한 그의 시신이 17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 도착했을 때 나라 전체가 거대한 장례식장을 방불케 했다. 캄보디아 신문인 <프놈펜 포스트>의 한 기자는”국왕의 서거에 많은 국민이 슬퍼한다. 국민들은 그를 캄보디아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지도자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1941년 왕위에 오른 시아누크 국왕은 국민들로부터’왕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었다. 깊은 슬픔에 빠진 캄보디아 국민과 시아누크 국왕이 걸어온 캄보디아 현대사는 암울했다. 1970년대는’킬링필드’로 악명이 높았던 크메르 루주(캄보디아 공산당) 정권 탓에 무고한 희생자가 넘쳐났다.

그 당시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 5명과 손자 15명도 죽임을 당했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시도한 바 있다. 그때 죽지 못하고 살아난 그는 칠순을 넘긴 후”내가 불교신자만 아니었다면 조국의 절망적인 상황을 비관한 나머지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죽지 못해 살 만큼 캄보디아 상황은 험난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그는 두 차례의 왕위, 대통령, 총리, 국가수반, 망명 지도자, 상왕 등을 거치며 캄보디아 현대사를 온몸으로 돌파한 현실 정치인이었다.

시아누크 국왕이 노로돔 수라마리트 왕과 시소와트 코사마크 왕비의 큰아들로 태어난 1922년은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던 때였다. 그의 외할아버지인 국왕이 사망한 뒤 아버지가 왕위를 계승할 차례였기에 시아누크는 애초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프랑스 식민당국은 그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그를 전격적으로 왕위에 올렸다. 젊고 패기에 찬 그는 일본이 캄보디아를 점령하자 일본을 등에 업고 프랑스로부터 캄보디아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일본이 패하자 돌변해 프랑스 식민당국의 귀환을 환영하며 프랑스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가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렸고, 마침내 프랑스를 설득해 1953년 11월 캄보디아의 독립을 얻어낸다. 그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얻어낸 것을 두고 캄보디아 국민은 그를’독립의 아버지’라 부르며 존경한다. 1955년 그는 아버지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사퇴했다. 그런 후 그는 새 왕 치하의 총리 외무장관 유엔 상임대표를 지냈고 5년 뒤인 1960년 4월3일 아버지가 죽자 스스로를 왕 대신 국가원수라고 칭했다.

시아누크는 중립주의 정책을 내세웠다. 국내의 좌 우 양파 급진주의자를 통제하고자 노력해 캄보디아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당시 다른 많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격변을 겪은 데 비해 그가 온건정치를 펼친 캄보디아는 비교적 평화로웠고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1965년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사회주의를 옹호하던 시아누크는 미 제국주의를 비판했다. 미국은 캄보디아를 폭격했고 그는 1965년 미국과 단교했다. 이것이 캄보디아 내전의 불씨를 제공했다. 시아누크가 한편으로 캄보디아를 내전으로 몰고 간 장본인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금 상태에서 끔찍한 학살 지켜봐1970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 놀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시아누크를 쫓아냈다. 그는 중국과 북한에서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망명 생활 중 시아누크가 론 놀 장군을 몰아내기 위해 손을 잡은 세력이 바로 ‘킬링필드’의 주역인 크메르 루주였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그가 여우를 잡으려고 범을 불러들인 꼴이었다.

시아누크의 아낌없는 지지를 바탕으로  크메르 루주가 론놀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1975년 그는 다시 고국인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가택연금이었다. 국민의 사랑을 받는 시아누크를 이용해 정권을 잡은 크메르 루주가 시아누크를 버린 것이다. 그리고 크메르 루주 정권은 캄보디아를 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연금 상태에서 그는 3년간 국민 170만여 명이 학살과 기아, 질병으로 숨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1979년 1월 베트남군에게 함락당한 크메르 루주 정부는 유엔에 나가 크메르 루주를 옹호하라며 시아누크를 석방했다. 그러자 그는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침공을 고발하고 크메르 루주와도 관계를 끊었다. 그는 둘 다 비판하며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중립주의를 택했다. 크메르 루주가 몰락하고 1993년 5월 유엔이 주관하는 캄보디아 총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 선거 결과에 따라 구성된 의회는 그해 9월 군주제 복귀를 의결했고 시아누크는 다시 국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말이 국왕이지 실권은 총리가 갖게 되고 그는 상징적인 군주에 불과했다. 그의 아들인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는 제1총리가 되었다. 총선에서 아들 라나리드 왕  자의 정당이 압승  했으나, 내전을 우려한 시아누크는 아들에게 공동총리제 를 제안해 훈 센에  게 권력을 이양했  다. 1997년 7월 제2 총리인 훈 센은 쿠 데타를 일으켜 라나 리드를 축출했다.

축출된 라나리드는 해 외로 도피하게 되었고  훈 센은 반역죄 명목으 로 라나리드에게 35년  형을 선고했다. 1998년  시아누크가 총리직에서 쫓겨나 망명 중인 아들라나리드에 대한 사면 을 거부한 사건은 당시 그의 곤혹스러운 처지를 잘 말해준다. 시아누크는 “나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불행한 아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한다면 조국은 붕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면은 국왕의 고유 권한이지만 시아누크 국왕의 이 같은 결정은 무력을 통해 캄보디아의 정권을 장악한 실력자 훈 센 총리가 공개적으로 라나리드의 사면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름뿐인 국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아들인 라나리드 왕자에게 “아무런 실권이 없는 아버지를 용서해 달라”고 편지를 썼다. 그는 몰락해가는 왕국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하고 자기 아들조차 구하지 못하는 불행한 국왕이었다. 2004년, 시아누크는 이름뿐인 국왕 자리를 아들 시아모니 현 캄보디아 국왕에게 넘겼다. 그리고 시아모니는 국왕의 권한으로 라나리드 왕자를 사면해 캄보디아로 돌아오게 했다. 일부에서는 시아누크가 큰아들 라나리드의 사면을 위해 시아모니 국왕에게 왕위를 넘겼다는 말도 있다.

시아누크가 걸어온 길은 엄정 중립이었다. 시아누크는 총선 때도 후보자들에게”나의 이름을 팔지 말라”고 직접 당부하곤 했다. 캄보디아 각 정파의 중재자 구실을 하며 그가 원했던 것은 다시는 캄보디아에 피바람이 불지 않는 것이었다.’적도의 곡예사”줄타기 외교의 달인’이라 불리며 긴 세월 캄보디아를 위해 가슴 졸였던 시아누크 국왕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 시사인-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댓글 남기기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