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따뜻한 잔소리 차가운 위로

기사입력 : 2015년 08월 12일

어느 노동자의 전언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뤄낸 대한민국의 사례는 근대의 인류 역사에서 유례가 없다. 반면 그 위대한 나라의 젊은 국민들 역시 비슷한 예가 드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와중(渦中)에 따뜻한 위안으로 그들을 쓰다듬는, 시대의 멘토라 불리는 몇 분의 책들이 있어 다행이다. 영혼을 적시는 그분들의 글솜씨는 초짜인 나로서는 정말 부럽다. 상처받은 이들에게는 어떻든 치유가 우선이니 말이다.
청춘의 특징은 아픔이라고들 한다. 그러니 아프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는 없단 말씀은 자체로 힘이 될 수 있다. 개인의 난관(難關)을 극복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아픔이 자신들 미숙에서 오기보다 현실의 지나친 모순에서 기인하는 것일 때는 어떡해야 할까. 그렇더라도 먼저 자성하고 스펙을 미친 듯이 쌓으며 더욱 성숙하여 발전하려는 태도를 가지는 게 바람직한 순서일까.
힘겨운 이들이 많은 시대라 나 역시 따스한 글을 쓰고 싶고 궁극에는 그러한 경지에 가고자 원한다. 하지만 지금은 잔소리로 들리기 일쑤인 문장들을 쓸 수밖에 없어 희망이 필요한 청년 독자들에게 무척 미안하다. 당장은 듣기 고까울지 몰라도 길스승이라면 그런 조언 해야 한다 생각하며 그 차가운 거슬림이 오히려 앞으로의 삶에는 이롭다고 믿는 때문이다.

현재 캄보디아에 거주하고 있는 나에게는 프놈펜 시민의 시각이 어느 정도 붙어 있으리라.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일면 자연스런 일이기에 굳이 그런 면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살고 있는 그곳에서 주인 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타당한 흐름이기도 하다.
가끔씩 한국에 다녀가게 되면 정도 이상 굳은 표정들 자주 만나 마음이 무겁다. 특히 청년기의 서울시민들이 보여주는 냉정하고 싸늘한 행동들에 대한 언론 보도는 숨이 턱턱 막히게 만든다. 예의 바른 나라, 정이 넘치는 국민들이란 수식(修飾)은 이제 우리에게 맞지 않는 옷이 된 듯해 당혹스럽다.
대체로 승자 독식의 약육강식 문화가 시나브로 자리잡은 게 원인인 듯 보인다. 열심히 일하면 시간제 노동자가 정규직보다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일본발 풍문(風聞)이 가슴을 저미고 부러움을 자아낸다. 버릇없음이나 패기부족이 일상이 된 청춘들의 문제는 그렇다면 사실은 어른들의 문제가 아닐까.

하루가 고단한 젊은 세대에 주는 온기어린 격려는 말이라도 그리 해주시니 감사하다는 리액션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기성세대로서 나눔에는 인색한 채 격려만 한다면 그건 말로 때우려는 게 된다. 나아가 그런 일들이 반복될 때 당하는 쪽에서는 차라리 대놓고 뺏는 사람보다 말로만 돕는 이가 더 미울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 구조가 심화되면 청년 세대의 포기는 심각한 수준이 된다. 듣기에도 감당이 쉽지 않은 ‘오포 세대’라는 말이 공연히 나왔겠는가. 당연히 구조를 개선하고 그것을 제도화하는 게 바른 해법이다. 올바른 길은 놓아둔 채 국내 관광이 애국이라는 식의 표어나 내걸며 일마다 국민의 착한 마음에만 기대려고 하는 것은 이른바 리더들의 도리(道理)가 아니다.
동정하는 마음과 남을 도우려는 선행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건 종교인들에게 맡겨 두면 된다. 선심(善心)에서 비롯되는 기부는 아름답지만 책임져야 할 자리에 있는 이들이 기부를 유도하는 것은 직무 유기이다. 세금을 당당하게 제대로 거두어 국민들이 공평하게 잘 사는 세상을 지향하는 게 선진국 정치인의 바른 의무이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보려 한다. 전철역마다 넘치는 원룸텔, 리빙텔, 미니텔, 고시텔 운운의 숙소들 말인데 옛 이름으로 하면 고시원이다. 몇 차례의 경험에 의하면 그 무수한 좁은 방들마다에는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장의 기거(起居)를 해결하려는 젊음들이 과반 이상 차지하여 기약 없이 살고 있다.
아마 자세히 조사해 통계를 낸다면 그들의 거주 형태는 더 비관적일 거라고 추측한다. 그 갇힌 젊음들을 나는 매우 가슴아파하고 있다.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반드시 넓은 방에서 나오는 건 아니겠으되 어느 정도 몸은 움직일 공간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잠깐 다녀가는 나 같은 사람은 기껏해야 한 달 가량 묵는 불편이라 차라리 추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년을 한결같이 지내야 하는 거주인들에게 그곳은 과연 무슨 느낌일까. 대개 한 평 남짓인 그 공간은 감옥(監獄)보다 그리 나을 게 없어 보인다.

교도소(矯導所)에 보내야 할, 부정부패라는 잣대로 잰다 할 때 캄보디아보다 한국이 덜하다고 자신 못하겠다. 거기에 정치나 외교라는 쪽으로 기준을 옮기면 오히려 장기 독재의 캄보디아가 민주적 정권 교체의 대한민국보다 더 잘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느 나라가 선진국일까.
단순 비교 하나만 더 하자면 행복지수로는 우리가 현격하게 밀린다. 하위 계층 삶이 팍팍한 거야 비슷한데도 행복도 차이가 이러한 건 상대적 박탈감이 더욱 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캄보디아가 맞닥뜨린 현저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복이 부러워 보일 때가 많은 것은 정글 닮은 한국의 현실 때문 아니겠는가.
폭염 덮친 8월 초의 서울서 인터넷 뒤지다 만난 유력 일간지 제목을 그대로 소개해 본다. ‘자리 양보 한다고 “늙은이들 버릇없어진다”는 무개념 커플’로 되어 있다. 동방예의지국 벌써 아니고 살벌한 정글이 되어버린 한국에 대한 책임은 ‘무개념 청춘들’에게도 분명 있을 것이로되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가 더 느껴야만 하고 그것을 앞장서 나누어 소위 연착륙 해낼 방도(方道)도 그들이 먼저 찾아야만 한다./한유일 (교사 shiningday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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