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역사탐방] 현대 캄보디아

기사입력 : 2015년 03월 26일

4514862248_33435b236c

독립을 선언하였던 시하눅은 7명의 내각을 구성하고 일본인 정치 고문을 두었다. 이 내각의 구성원은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가져본 적도 없었을뿐만 아니라 프랑스 식민시절에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들 이었다. 일본군의 행동대원 역할을 했던 이 내각 구성원들은 단지 자신들의 직위유지만을 바라는 인물들이었다. 일본군이 패전하여 돌아가고 프랑스가 복귀함으로써 거의 완성되었던 캄보디아의 독립은 날아가버렸다. 프랑스군이 복귀한 뒤 일본군에 협력했던 인물들과 독립운동가들을 구금한 뒤 독립기념일 등을 폐지시켰다.

그러나 프랑스가 베트남에게 패하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게되고 캄보디아는 1954년에 독립하게 된다. 1963년 시하눅은 수상으로서 자신의 임기를 영구히 하는 헌법 개정을 국회에 강요하여 통과시켰다. 국민 투표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고 선거에 참패하자 강제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시하눅은 좌파와 우파를 조절하고, 정치적 통제, 협박, 후원 등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했다. 이 과정에서 비밀경찰 등을 다수 동원하여 반대파를 제거했다. 세계전쟁에도 식민 시절 갖추었던 도로나 철도 등의 시설이 거의 온전하게 보존되어있어서 독립 이후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업고 경제성장을 이루어 낸다.

NorodomWithDS

그러나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격화되어가자 이러한 정책의 유지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또한 국경을 넘는 쌀 밀매가 캄보디아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시하눅 자신 또한 경제 분야를 신경쓰기보다는 권력유지와 개인적인 일에 신경을 많이 썼으므로 캄보디아의 경제는 점점 추락했다. 경제적 분야를 제외한 외교적 분야를 보더라도 다르지 않았다. 시하눅은 이득이 된다고 판단할 때마다 미국, 중국, 소련, 유럽 등에 무차별적으로 우호적인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줄타기 외교는 금세 한계에 부딪혔고 시하눅의 캄보디아는 믿을 수 없는 국가로 낙인이 찍힌다.

시하눅이 지휘하는 캄보디아는 초반에는 비교적 원만했지만 얼마있지않아 시하눅의 독재를 위한 국민 탄압이 가속화되었다. 또한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했으며 경제적 악화가 계속되었다. 이렇게 되자 군부 지도자인 론놀과 우파는 시하눅에게 큰 실망을 하게되고 결국 1970년에 론놀과 국회에서는 시하눅을 수상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크메르 공화국을 설립한다.  / 글 : 박근태(왕립프놈펜대학 크메르어문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