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갑질하드래요

기사입력 : 2015년 03월 05일

일월 일일의 강변

미디어 파사드, 건물 외벽을 스크린 삼아 영상을 구현하는 걸 의미하는 최신 용어이다. 서력(西曆) 새해를 맞는 제야(除夜)의 밤, 부분 개장한 강 건너 호화 호텔 소카의 벽면엔 햇살 무늬가 현란(絢爛)하게 움직였다. 벌써 재작년, 도착해 임시로 묵었던 이쪽 강변 히마와리 호텔[葵花大酒店]의 벽은 물방울 아롱거렸다.
내가 거주하는 빌라의 강변 쪽 문을 나서며 오른쪽으로 보이는 다리를 건너면 꼬삑 아일랜드, 그 근방 역시 화려한 조명 번쩍거린다. 섬 쪽에서 다리를 건너며 이어지는 도로의 좌측에는 카지노 호텔 ‘나가 월드’가 있다. 도로는 모토가 주가 되고 툭툭과 승용차가 드문드문 섞인 탈 것들로 콩나물시루처럼 메워져 행복한 흥분감이 팽팽히 번져 있다.
어디선가 카운트다운 들리는가 싶더니 허공을 찢을 듯한 굉음(轟音)이 귓전을 때린다. 매캐한 화약의 냄새가 매섭게 코를 찔렀고 바로 머리 위에서 터지는 불꽃은 무섭도록 황홀했다. 그날의 발사 장소는 내가 섰는 곳에서 불과 십 수 미터 남짓이라 타다 만 조그만 불꽃 알갱이들이 얼굴 주변을 날아다녔다.

정신 빠진 듯 얼마간 서 있다 퍼뜩 얼굴에 화상 입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쨀 기세로 고막을 두드리던 소리가 잦아들면서 사람들 함성은 시나브로 커지고 있었다. 부근의 조금 높은 곳으로 올라가 강변의 대형 무대를 보니 눈에 가면을 쓴 성인 키만한 크기의 서양인들 얼굴 사진으로 도배된 가림막이 서울 뺨치게 호화롭다.
눈길을 비로소 내가 좋아하는 강물로 돌렸을 때 거기 또한 번쩍거림이 자리하고 있었다. 검은 강물을 배경해서인지 떠있는 유람선들의 다양한 꾸밈등이 환상적이었다. 평소라면 진즉 끊어졌을 강안을 왕복하는 여객선들도 나름의 등 장식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캄보디아에 온 뒤로 자정이면 거의 깨어있는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달리 고단했던 한 해를 보내는 날 현지인들의 흥겨움에 달밤 체조하듯 어울려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그처럼 신나는 즐거움에 공감하는 한편 대책 없는 행복감에는 그만큼의 과보가 따를 터인데 준비는 되어 있는 걸까 걱정도 슬몃 들었다.

그렇게 한 해를 열어 한 달 남짓이 지났으니 차분해질 즈음인데 ‘중국 새해’ 분위기로 서서히 거리가 새악시 볼처럼 다시 달뜬다. 물론 한국인인 나로서는 프놈펜에서나마 ‘설날’을 느낄 수 있어서 반갑다. 다만 여기 사람들 들러리 서듯 휘둘릴까 노파심을 어쩔 수 없다.
아내의 말에 근거하면 나는 ‘지구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사는 사람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의 사람들이 오늘의 내 이웃이다. 이웃을 사촌으로 생각하는 한국인의 정서상 그들 살림에 신경 쓰임은 당연한 일 아닐까.
모두가 들뜨고 행복해 보였던 그날 밤, 카지노 ‘나가’ 앞 도로서 경찰에게 모토 키를 뺏긴 청년들이 생각난다. 아무 저항도 못하고 쭈뼛거린 그들이 화를 돋우었을까. 경찰은 발로 모토를 몇 번 내지르더니 분이 덜 풀린 듯 키를 잡아 빼 뺏어버렸다.

한국 사회를 뒤흔든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은 이제 잠잠해질 때가 되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관련 당사자들이 적절하게 처리할 정도의 사회가 되었음을 믿고 묵묵히 지켜볼 때라는 견해가 고견이라고 생각한다. 도에 지나침은 여축없는 동일함을 보여줄 수 있다.
오너의 딸이 보인 추태는 이미 충분하고도 넘는 벌을 받았으되 행동에 비추어 그럴 만하니 여기서는 처벌 문제는 논외로 하자. 논점을 좁혀 오직 ‘여론에 떠밀린 검찰’ 부분을 확대하여 보자면 중세의 마녀 사냥을 보는 느낌도 살짝 든다. 요컨대 ‘싸가지 없는 갑’은 죄를 넘어서는 처벌을 받아도 옳은 것일까.
과(過)하다는 나의 생각이 타당하다면 그런 과장된 처벌을 유도한 이들 역시 ‘갑질’을 한 게 된다. 내가 규정하는 ‘갑질’이란 힘과 권력을 가진 거대 집단의 행동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부당한 자의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단지 눌려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갑질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사회 전 방위에 소위 자신만의 잣대로 정의를 휘두르는 ‘인터넷 전사들’의 행동을 ‘모두까기’라 부르는 걸 보았다. 그것이 정당하려면 ‘까기’ 전에 얼마큼 나 또한 아파했는가에 달려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입장을 바꿔[易地思之] 부당한 짓을 한 자가 나라 생각하고 다가오는 사회의 처벌들을 ‘가상현실’에서 감수해 본 다음에 한 지적이라야 진정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 주요 특징의 하나로 내가 꼽는 ‘넘들’ 따라 핏대 세우는 문화는 옳지 못하다. 자신은 하나도 아프지 않은 채 여론에 슬쩍 돌 하나 얹어 뭇매 맞은 자를 몰아세우는 건 야비하다. 사자가 힘들여 잡아놓은 먹이를 우르르 몰려들어 가로채는 하이에나 모습이다.
프놈펜은 예년보다 서늘해 현지인들 아침이면 추위 느끼고, 입춘 지났지만 서울 풍경들 여전히 싸늘해 보인다. 죄 지은 자 마땅히 벌 받아야 함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임 너무도 분명하다. 다만 영문도 모르고 누군가의 갑질에 도(度)에 넘는 억울함을 당하는 일은 ‘위’서도 ‘아래’서도 벌어지지 않아야 한다.

한유일(교사) shiningday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