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역사탐방] 근세 캄보디아3

기사입력 : 2015년 02월 17일

1904년 노르돔이 사망한 후 그의 동생인 시소왓이 64세에 왕위에 오른다. 노르돔에게는 여러 왕자가 있었지만 대체로 반프랑스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1870년대 일어났던 폭동을 계기로 프랑스는 시소왓에게 왕위를 약속했기 때문에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당연했다. 시소왓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프랑스는 식민작업을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

83894277.YIrBqjIn.CambodiaJul07292

프랑스는 도로나 철도 같은 사회기반시설을 정비하고 관료 제도에 변화를 주었다. 보다 효과적인 행정을 위해 중간 관리자를 잘 훈련받은 베트남인으로 두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캄보디아 지배층들이 분노하였지만 폭동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시소왓의 시대에는 근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 또한 개선되었다. 캄보디아의 경제는 농업 경제기반에서 농산물과 고무 수출경제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이미 거의 모든 권력을 넘겨준 시소왓은 프랑스 식민지작업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의례적인 행사나 역대 왕들처럼 풍년제나 기우제 등의 궁중 행사에 참여하는 일밖에 없었다. 시소왓은 결국 프랑스에서 주는 아편을 즐기며 노르돔과 같은 말년을 보낸다. 그의 시대에 주목할만한 사건은 1907년 프랑스와 태국의 협상에 의해서 시엠립과 바탐방 지역을 태국에게서 반환받은 것 정도이다. 이로 인해 앙코르 유적을 되찾을 수 있었고 바탐방 지역을 통해 쌀 생산이 증가하여 경제적인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Library Bldg Phnom Penh

캄보디아의 프랑스 지배에 대한 저항은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1830년 보호조약이 보여주듯이 당시 캄보디아는 주위의 강대국의 위협과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고 프랑스는 베트남을 강점하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던 시기에 캄보디아의 보호요청은 캄보디아 진출에 대한 기회였다. 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20여년간 프랑스의 지배에 대한 캄보디아의 저항은 없었고 1880년대에 이르러 프랑스는 베트남 전 지역을 장악한 뒤 캄보디아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지만 전국적으로 일어난 폭동 때문에 무산된다. 이 사건으로 노르돔은 권력을 잃게되고 시소왓이 왕위를 얻게 된다. 그리고 캄보디아인 사이에서 민족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 글 : 박근태(왕립프놈펜대학 크메르어문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