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하염있음

기사입력 : 2014년 11월 20일

고국(故國)의 가을을 머릿속 생각 비워낸 채 작정 없이 걸었다.
가을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가슴 한켠 스산한 바람이 일고 고국을 떠올리면 짠한 교민들껜 공연히 미안한 일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더위 일변도의 프놈펜에선 서울 어느 가로수길 떠올려도 그리움의 대상이다. 일 년 만에 보는 나뭇잎들이 촉촉이 가을색을 띠어간다.
가끔 샛노란 은행잎 수북한 거리를 우수에 흠뻑 젖어 걷고 싶을 때가 있다. 젖고 넘쳐 한 가득 모아다가 ‘나미나라공화국’에라도 가져다주면 주고받는 이들 모두 얼마나 행복하랴. 그런데 그것들 치우는 게 업(業)인 분들에겐 쌓인 단풍잎도 그저 지겨운 일거리일 따름이다.

설(說)해질 당시에는 제왕학이었다지만 이제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고전 〈노자〉에서는 ‘함 없음’을 권고한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선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겐 그래서 노자보다는 공자의 말씀이 더 옳고 친근하고 유용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공자의 정답 이상으로 노자도 바른 답이라고 할 부분이 있다. ‘무위’란 ‘행위가 없는 것’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작위적인 요소가 없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능성에 눈 감고 노자를 오답 처리하면 사회는 그만큼 여유를 잃고 거칠어진다.
간만에 느끼는 서울의 공기는 급작스런 추위만큼이나 서늘하다. 나는 옳은데 너는 몽땅 그르다는 독선의 바람이 살갗을 에는 듯하다. 예수 닮은 성자 오신다 한들 아무도 몰라보고 이단으로 치부해 십자가에 다시 매달 듯한 속 좁은 언설들이 사회 곳곳을 도배한다.

가을서울

‘나그네’는 곧바로 ‘설움’이던 시절이 분명하게 있었다. 나라를 앗긴 식민지 백성에게 오늘 걷는 걸음이란 ‘정처 없는 이 발길’이었기에 서러울 밖에 없었다. 하지만 설악의 단풍을 만끽하는 사람의 오늘은 ‘나그네 즐거움’이 너무도 자연스런 표현이 아니겠는가.
오랜만에 만나는 육교가 있어 올라보는데 층계참에 박카스 빈 병이 놓인 게 눈에 든다. 이 음료를 현지인 입맛에 맞게 다듬어 건강 지킴이 컨셉으로 수입한 캄보디아인이 있어 한 해 수십억 매출을 올린다 들었다. 인구 천오백만 남짓에 일인당 지엔피 천불 턱걸이의 캄보디아 경제 현실을 고려한다면 기적에 가까운 대박이다. 생긴 모양과 성분 비슷한 같은 박카스라도 한국과 캄보디아에서의 위상은 격세지감(隔世之感) 맞먹게 다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가을과 단풍을 떠올리며 고단한 캄보디아 일상을 서러워할 것인가 아닌가는 전적으로 당사자 자신에게 달려있다. 만약 체질적으로 더운 게 몸에 좋은 분들이라면 말 그대로 ‘캄보디아천국’일 것이기에다. 내가 여기에 단풍의 낭만 어쩌구 흔들어대도 심지 굳게 싱긋 추억의 미소로 가벼이 스쳤으면 싶은데 여러분은 어떠신가.

자연계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자연 닮은 언어 또한 대개는 가치중립적이다. 물론 똑같은 작용을 두고 부패와 발효라는 다른 이름을 붙인 경우는 인간 중심의 가치가 반영된 예외이다. 하지만 살기 위해 동일한 일을 하는 균의 처지에서는 가소로운 명명(命名)일 뿐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꼭 엉뚱한 딴지거는 분들 있으니 그러면 모든 균들을 동등하게 대하자는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이다. 균들에게 공평한 대접을 하자는 건 애볼라 바이러스가 들으면 감동할 말이겠으나 이는 언감생심(焉敢生心) 천만의 말씀이다. 그러한 현상을 잘 알고 지혜롭게 대응하되 필요이상으로 미워하지는 말자는 취지일 뿐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틀리게 사용하는 지구상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그러한 오용의 근저(根底)에는 ‘나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생각이 무의식 깊이 박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불구대천의 원수 대하듯 입에 거품을 물게 되는 게다.

태극기

하염없이 걷다가 문득 ‘하염’은 ‘하다’의 명사형 ‘함’의 이형태(異形態) 아닐까 싶었다. 그리 본다면 ‘하염’은 삶의 필수 요소이겠다. 행위가 없이는 당장 대지 위에 존재하는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지 말라’는 표현이 성립하는 뜻은, 그렇다면 기초대사활동 같은 필수적 행위를 말하는 게 아니겠구나 하고 짐작 가능하다.
불과 얼마 전 마음수련이라는 수행법으로 세계를 순회하던 분들이 프놈펜에서 귀한 소개의 시간을 가졌다. 기회가 되어 가 보았는데 내 입장에선 명상의 일종으로 느껴졌을 뿐 그분들 설명에 전적인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다만 ‘마음 빼기’라는 용어는 가슴에 묵직하게 와 닿았는데 그 방법은 한국인의 ‘나만 옳음 집착’을 놓을 수 있을 묘방으로 보였음이다.
이번 가을은 캄보디아 교민이든 한국에 사는 분들이든 모든 ‘하염’을 놓고 그냥 걸어보자. 하염없는 발걸음이 오히려 달관(達觀)으로 승화되며 가슴 속 응어리들을 녹여줄는지도 모른다. ‘나’를 빼어버린 자리에 나와 ‘틀린’ 그가 ‘다른’ 발걸음으로 다가와 뜻밖의 동행을 보여줄는지도 모른다. 공존 가능성 있었는데도 다만 나의 고집 인하여 그 길 모르고 있었음에 깜짝,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 생길는지도 모른다.
모처럼 서울길 걸으니 단풍 짙어지듯 가을생각 깊어진다.

한유일(교사) shiningday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