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한인 선교사 이야기] 제 29 화 캄보디아 주재 베트남인 디아스포라 사역 14년

기사입력 : 2020년 12월 18일

베트남과 태국은 지정학적으로 캄보디아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비롯한 전반적인 면에 그리고 캄보디아 인구의 95% 이상을 차지하는 크메르인의 종교와 세계관에도 매우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개신교 선교에서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는 16세기 이후에 두드러졌으며, 지금까지 500여 년 동안, 캄보디아 근현대사는 이 두 나라와 분리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가운데 베트남은 정치·군사와 지정학적인 면에서 캄보디아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현재 베트남에 150만 명 정도의 크메르인이 그리고 캄보디아에 10만-50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거주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베트남에 거주하는 크메르인은 모두 베트남 국적을 소유하고 있으나, 캄보디아에 거주하는 베트남인 대부분은 캄보디아 국적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

캄보디아 개신교 선교는 미국 C&MA를 통해 시작되었고 베트남을 거쳐 전해졌는데, 1920년대 초, 베트남 메콩델타에 거주하는 크메르인이 처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1923년 1월 말, 하몬드(Arthur L. Hammond) 선교사 부부가 베트남 경유, 캄보디아에 입국하였다.

826-2▲ 품둥장로교회 교사와 청소년부(2008년)

캄보디아에 주재하면서 베트남인 대상으로 선교 사역하는 한인 선교사가 다수 있는데, 그 가운데 필자 부부는 13년 동안 사역했던 베트남을 뒤로하고 2006년 6월, 캄보디아에 입국하였으며, 첫 사역지로 베트남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인 껀달(Kandal) 주 품둥(Phum Duong)에 품둥장로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때 당시에는 프놈펜 똔레(Tonle) 강변에도 베트남인 디아스포라가 있었는데, 프놈펜시에서 일정 거리 이상의 지역에 거주하도록 하는 정책을 세우자, 그들은 프놈펜 외곽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필자 부부는 2006년 12월, 품둥 지역 첫 방문에 이어 2007년 첫 주일부터 주일 예배를 드렸으며, 2008년 10월에는 그 마을 주민의 숙원인 캄보디아어(크마에)를 가르치는 정규 과정의 품둥국제학교를 설립하였다. 평일에는 크마에를 배우기 위해 1-6학년에 80여 명의 베트남인 학생들이 그리고 주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해 유초등부, 청소년부 학생들이 모였다.

826-1▲ 품둥국제학교 성탄예배(2017년)

문제는 이들 대부분은 캄보디아 국적이 없으므로 대학 진학이나 국가/지방의 정규 공무원으로 일할 수 없었으며, 여권 제작을 할 수 없기에 외국으로의 유학이나 취업도 불가능하였다. 다만, 품둥국제학교 6학년 졸업장을 근거로 인근 지역의 중학교 7학년 입학과 캄보디아인 가정으로 양자 입양하면서 대학 진학을 한 경우가 있었으며, 지난 14년 동안, 많은 베트남인이 예수 그리스도 영접 후 세례를 받고, 결혼과 취업을 하는 등의 크고 작은 열매가 있었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크마에를 가르치는 캄보디아인 교사가 거주하는 인근의 캄보디아인 무 교회 마을에 캄보디아인 대상의 교회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변옥선 선교사의 석사학위 논문 “캄보디아에 거주하는 베트남인의 의식구조 연구(총신 국제대학원, 2012학년도)”에 따르면, 캄보디아에 거주하는 베트남인 중에서 장차 베트남으로 돌아가겠다고 표현한 이는 놀랍게도 전무(全無)하다. 비록 캄보디아 국적을 취득하지 못해도, 주위의 캄보디아인들과 문화적·경제적 차이가 심각하고 심지어 캄보디아인들이 싫어하는 것을 알지만 그들은 베트남에 돌아갈 마음이 없다. 베트남을 떠나온 지 짧게는 20-30년 그리고 길게는 50년 이상이기에 돌아가도 그들을 반갑게 맞이할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캄보디아 주재 베트남인 디아스포라 사역은 그 향방이 보이지 않으며, 성인도 그렇지만 캄보디아에서 태어난 베트남인 2세, 3세를 생각하면 해야 할 일이 많기에 오늘도 묵묵히 복음의 씨를 뿌린다./장완익 선교사(KMAC 역사연구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