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이야기] 제14화 전쟁의 후유증과 교회 재건

기사입력 : 2020년 04월 24일

1975년 4월부터 1979년까지의 짧은 4년 동안, 캄보디아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깊은 상처를 받았으며, 그로 인해 당시의 인구 700만 명 가운데, 200만 명 이상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1979년은 캄보디아 역사 가운데, 또 하나의 특별한 역사가 시작되는데, 태국에 구성된 난민캠프 그리고 난민을 두고 벌이는 태국과의 갈등 그리고 캄보디아를 해방한(사실은 점령한) 베트남 군대에 의한 통치 등으로 서술된다.

791-2▲ 난민캠프 앞에서의 캄보디아 교회 지도자들

태국 정부는 캄보디아인을 비롯한 라오스, 베트남의 난민을 받았지만 한편 태국의 우익 집단은 캄보디아인 난민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1979년 6월 10일, 수백 명의 캄보디아인 난민을 미국으로 송환하는 것처럼 속여 방콕행 버스를 태운 뒤, 실제적으로는 캄보디아 쁘레이비히어(Preah Vihear) 절벽 넘어 캄보디아 쪽 지뢰밭에 이들을 버렸으며, 살고자 절벽 위로 기어오르는 난민은 태국 군인들에게 총살되었다. 베트남 군대는 프놈펜에 괴뢰 정권을 세웠으며, 헹삼린을 시작으로 1985년에는 훈센이 총리에 오른다.

캄보디아 국내 교회는 거의 문이 닫혔고, 믿음을 지키며 생존한 이 시기의 기독교인은 80명 정도로 추산한다. 캄보디아 교회의 최대 위기였다. 이 시기, 유일한 복음의 물줄기는 필리핀 마닐라 극동방송국(FEBC: Far East Broadcasting Company)에서 방출되는 라디오 단파 방송이었다. 이 복음 방송은 메마른 캄보디아 교회에 한줄기 시원한 물줄기처럼 역사하였다.

791-1▲ 진 클라바우드 선교사 가족

크메르루주 철수 이후, 캄보디아에 입국한 첫 선교단체는 무니함(Mooneyham) 박사가 이끄는 월드비전(World Vision)이었으며, C&MA, OMF, WCC 등이 뒤를 이었다. 1980년대가 시작되면서 캄보디아 내의 기독교인이 200여 명 정도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들은 프놈펜 올드 마켓(Old Market)과 껀달주의 따끄마으(Takhmau)에서 지하교회 형태로 모였는데, 젊은 지도자 그리고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사역자들이 모임을 인도하였다.

쟝 끌라바드(Jean Clavaud) 선교사에 의해 캄보디아어 성경과 TEE(Theological Education by Extension) 교재들이 밀반입되어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달되었으며, C&MA와 OMF는 태국 국경의 난민촌에서 이 과정으로 교회 지도자 훈련을 하였다. FEBC의 지도자 훈련 프로그램도 캄보디아 내외의 캄보디아 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당시 기독교는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였기에 실제적으로는 불법이었고, 교회는 찢긴 채, 다시 모일 수 있는 희망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자 많은 기독교인은 태국의 피난민촌으로 나갔는데.

비록 여러 가지가 불편했지만, 예배와 전도에 대한 여건은 국내보다 좋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당시 캄보디아는 국내와 태국의 난민촌 캠프 사이에 기본적인 교류가 있었으며, 난민촌 캠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제3국으로 가서 성경학교나 신학교에서 공부 후, 캄보디아로 돌아와 교회 지도자로 성장한 사례가 많았다. 1979년 말부터 1981년까지 외국에 주재하던 타이 응엣(Thavy Ngeth)과 다라릿 펜(Dararith Pen) 목사는 스라까우에서 활동하다가 ‘엠마오성경학교(Emmaus Bible School)’를 조직하여 제자 훈련을 하였다./장완익 선교사 (캄보디아교회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