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더 알아보기] 제10화 삼랑시, 정치고수 훈센도 인정한 유일한 맞수

기사입력 : 2019년 09월 11일

삼랑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바로 2013년 7월 19일, 프놈펜 공항부터 러시안 로를 따라 지지자들이 그의 입국을 열렬히 환영하던 모습이다. 그날을 기점으로 캄보디아에 새로운 역사가 쓰일 것이라고 얼마나 다들 열광했던가. 그의 귀환으로 대학가 젊은 학생들은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넘쳤고 “도우! 도우!(바꿔! 바꿔!)”를 외치며 거리 행진하던 한국어학과 학생들이 포착될 때면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캄보디아 민주주의의 새 장을 여는 현장에 함께 있노라는 감동에 울컥하곤 했다.

이렇듯 명실상부 캄보디아의 유명 야당 정치인 삼랑시는 프랑스 국적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2008년 명예훼손 혐의로 구형되자 프랑스로 귀국했다가, 2013년에 국왕의 사면으로 입국하지만, 2015년에 사면이 철회됨에 따라 다시 프랑스에서 머물고 있다. 아직까지는 훈센 총리가 정치적 맞수로 인정하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해서 국내에 부재할지라도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래서 혹자는 옥중투쟁을 감행해서라도 지지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고국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고 때로는 죽음도 불사할 것을 강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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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시는 1949년 3월 10일 프놈펜의 명문귀족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쌈니연은 1940년대 왕실 고위 정치인이었고, 아버지 쌈싸리는 1950년대 시하누크 정부에서 장관직과 부총리직을 거쳐 영국의 런던 대사를 역임한 바 있으며, 어머니 인아엠은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한 최초의 캄보디아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쌈싸리가 1950년대 후반에 정부 전복을 시도했다는 ‘방콕음모론’에 휩싸이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1965년에 인아엠은 16세의 삼랑시를 데리고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파리의 금융회사에서 투자매니저 겸 이사직에 종사하다가 43세가 되던 1992년에 캄보디아로 돌아와서 다음해에 푼신펙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런데 재무부 장관으로 역임하던 1994년 당으로부터 불신임을 받고 축출된 뒤 직접 크메르민족당을 창당하고 1998년에 삼랑시당으로 개명하면서 연이은 총선을 통해 점차 두각을 드러냈다. 1998년 15석, 2003년 24석, 2008년 26석 그리고 야당통합으로 결성한 캄보디아구국당(CNRP)을 통해서 2013년 총선에서는 55석을 차지하며 선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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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3월 30일 국회 밖에서 삼랑시의 크메르민족당 시위대에 수류탄 투척사건으로 쓰러진 삼랑시

* CPP(캄보디아인민당)측이 1998년 총선을 앞두고 푼신펙당과 삼랑시당의 연대를 경계하여 응징을 가한 테러로 16명이 숨지고 1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삼랑시는 경호원이 몸으로 막으면서 구사일생으로 화를 면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서 오늘날까지도 국외 체류를 거듭하며 운신의 폭을 제한할 만큼 큰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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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8월 26일, 7월 28일 선거결과에 대한 공개포럼을 마치고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CNRP 삼랑시 총재와 켐쏘카 부총재

이후 삼랑시를 총재로 하는 CNRP는 여당의 부정 선거 의혹을 주장하며 1년이 넘도록 정부를 규탄하고 시위를 선동하며 국회 등원을 거부했다. 2013년에 삼랑시의 입국을 환호했던 대중도 실망이 늘어가고, 달래고 어루어도 말을 듣지 않자 드디어 몽둥이가 약이라고 판단했던지 여당 패거리로부터 데모단이 습격받았다는 뉴스가 종종 들려왔다. 그러던 2014년 7월 22일, 훈센 총리와 삼랑시 총재가 평화의 악수를 나누고 CNRP가 국회에 복귀함으로써 캄보디아에도 드디어 진정한 다당제의 초석이 마련되는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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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4월, 씨엠립 앙코르 송크란 축제에 참석 중인 훈센 총리와 삼랑시 총재간의 평화로웠던 한 때

그러나 훈센 총리를 위시한 여당 측은 언제든지 이들을 쳐낼 수 있었다. 다만 국제적인 관계 구축에 있어서 야당의 입지를 보장하는 미국이나 서방 세력이 얼마나 직접적으로 캄보디아에 실익을 줄 수 있는가에 따라 삼랑시를 위시한 야당의 운명이 저울질되는 것은 아닐까? 결국은 중국은 가까이 있고 미국은 멀리 있는 듯해서 미국과 서방세계를 뒷배로 하는 삼랑시는 언제든지 내쳐질 수 있는 카드인 셈이다. 2013년 당시 미국의 요청으로 훈센 총리가 현 국왕에게 청했던 사면은 2015년 11월 단박에 철회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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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범죄자가 되어 프랑스로 떠난 삼랑시는 CNRP를 지킬 수 없었고 켐쏘카 부총재 역시 역부족이었다. 켐쏘카는 간통혐의로 기소되고 CNRP는 대법원으로부터 해산이 결정됐다. 그리고 국제 사회의 감시도 생략한 채 2018년 총선에서 여당이 국회 전 의석을 석권하는 기록을 달성했다. 한편 삼랑시는 훈센 정권에 대한 국제 사회의 압력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2018년 1월에 캄보디아구국운동(CNRM)을 창설하고 미국과 EU 회원국의 공조하에 여전히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왕립프놈펜대학교 한국어학과 이영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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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1월29일, CNRM 창단식에서 연설하는 삼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