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명을 혁하는 사랑

기사입력 : 2016년 05월 05일

명을 혁하는 (1)

만해 스님이 ‘님’의 부재를 ‘침묵’으로 노래했을 때 그 님은 ‘상실한 조국’을 함의(含意)할 개연성이 컸다. 승려 신분을 고려하면 ‘부처님’이란 해석이 가능하고 연애시로도 훌륭하게 읽히므로 ‘애인’을 뜻할 수도 있다. 나아가 보편 인류애가 부족한 지구촌을 바탕에 깔아 ‘신적 존재’와 연결지어도 전혀 무리가 되지 않으니 훌륭한 시의 함축(含蓄)이란 이와 같다.
젊은 캄보디아 친구가 한국은 언제부터 기독교 국가였냐 물은 적이 있다. 뭔 뚱딴지 같은 소리냐 되물으니 국가인 ‘애국가’에 ‘하느님’이 나올 정도라면 그런 것 아니냔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하늘님’의 ‘ㄹ탈락 현상’으로 비유하자면 우리 민족이 ‘태양의 후예’임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도 일부가 그것을 유일신 개념으로 느끼며 불렀다 하여 시비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함축 영역에 그처럼 자유를 부여하는 게 대한민국 체제의 우월성 아니겠는가.
4월 19일 오전 버스를 타고 조그만 시골 마을로 향하는데 퍼뜩 문장 하나가 머리를 점령하였다. ‘민중의 넋이 주인되는 / 참세상 자유 위하여 / 시퍼렇게 쑥물 들어도 / 강물 저어 가리라.’ 가사의 민중이란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있을 터인데 검색하다 보니 1989년 12월 17일 어느 신문 기사 제목은 ‘‘운동권 노래’ 방송사상 첫 인기가요 뽑혀’였다. 대중(大衆)들의 일반적 정서(情緖)에도 잘 다가갔다는 얘기이니 그것을 ‘국민’이나 ‘백성’으로 바꾸어도 무방하고 주는 느낌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앞의 두 구절은 내가 꿈꾸는 정의사회(正義社會)와도 통하여 좋았으나 다음 구절을 읊조리다가 ‘너라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내면 물음에 나는 갑자기 진중해졌다.

어릴 적 감정의 결에 순응(順應)하노라니 어느새 지천명을 훌쩍 지난 나이가 되었다는 게 새삼스럽다. 하지만 역사의식 지닌 우리라면 4월의 열아홉 번째 날은 공동체를 위하여 노래 화자처럼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가를 한번쯤은 물어야만 한다. 그대는 보수 진보 떠나 ‘유시진’처럼 ‘알파팀’처럼 흔쾌히 조국 위해 생명 걸 수 있는가.
예를 들어 내 한 몸을 바쳐 한반도가 온전한 통일이 된다면 나설 만하지 않을까. 물론 여기에는 당연히 전제(前提)가 있으니 남북 모든 구성원들이 과반 훌쩍 넘겨 원하고 바라는 구성체를 평화의 합의로 이룰 경우이다. 다시 말해 양쪽 정치 지도자들이 가야와 신라처럼 마음 비우고 기득권 양보하여 그것을 수용할 때를 말한다.
옛날에는 환갑이면 다 산 목숨이라고들 하였다. 하여 그 기준 따르면 살 만큼 살았으니 포기하는 셈치고 선뜻 나서려는 것인가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요즘 느끼는 바는 하루를 열심히 살아갈수록 삶이라는 건 정말로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깨우침이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의 시민혁명 아침에 그런 생각을 가져보는 건 내 삶이 무료하고 가볍게 느껴져서가 아니다. 나의 삶 고귀하고 아름다울수록 통한 맺힌 우리 민족이 하나 되어 원망의 비통함을 풀고 통일 이룬다면 그 아름답고 고귀함이 어떠할까 싶었다. 8천만 넘는 한반도 구성원들이 행복 느낀다면 기꺼이 나의 육신 민족애의 제단에 올릴 수도 있겠다는 가늠이 드는 건 비단 나뿐 아니고 상당수 양식(良識) 지닌 시민들 또한 그러시지 않을까.
최근에 끝난 드라마 ‘태후’를 작가가 직접 환타지라 언급한 기사를 읽었다. 내게는 ‘현실감 의미 있게 덧입힌 환타지’였다. 주인공 유시진은 말할 것도 없고 알파팀과 애인들은 물론 소소한 주변 인물들까지도 총명하며 배려심 깊고 헌신적인 캐릭터들이었다. 하나를 던지면 둘 넘어를 받아 채어 분위기 어울리게 대응하는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 사회란 당연히 화중지병(畵中之餠)의 세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드라마를 왜 썼을까 생각할 때 그와 같은 ‘헌신과 배려’의 인물들이 그립다는 이야기 아닐까. 작가뿐 아니라 대중들도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기에 높은 시청률로 관심을 표한 것이라 판단된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바라기만 할 게 아니라 우리 또한 ‘헌신의 인간’이 되어보려는 생각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런 생각을 적어 보는 건 잘난체와는 거리가 멀다. 아무리 위인들 삶 살피며 견주어 봐도 나와는 너무나도 먼 궤적(軌跡)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체 거의 모두가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이상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부름이라 할 때는 할 만한 도박이라 보인다.
물론 노래의 화자가 나보다 훨씬 위대한데 그건 ‘쑥물 들어도’ 견디겠다는 발언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실제로 적지 않은 수의 독립투사와 민주화 영웅들은 그렇게 견디어 우리 사회의 오늘을 뒷받침했음을 우리는 안다. 허나 유달리 겁 많고 감수성 예민했던 내 생애를 돌아볼 때 나는 고문이나 모욕을 견딜 자신은 없다. 그저 오로지 진지하게 우리 사회 위해 당신 정의감의 증명이 요구된다고 성심성의껏 설득해 온다면 경건하게 임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일제 강점기 끝 무렵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움을 꽃 피운 순수 영혼의 시인이 있다. 그는 ‘목아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고 노래했다. 감히 닮고 싶은 태도이되 몸과 마음을 조롱한다면 그것을 감내할 자신은 없어 나에게 위인(偉人) 흉내는 턱도 없다 짐작하는 것이다.

캄보디아 주변 나라들은 4월 중순이면 물축제를 겸한 새해맞이들을 한다. 기나긴 건기를 지나면서 드디어 고대(苦待)하던 혁명 같은 하늘의 사랑을 우기 시작과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현금(現今) 남아시아 전역이 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4.19에 떠나 다녀왔던 촌에는 중심도로 양편으로 제법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해 뜰 무렵 산책 겸하여 가까이 가 보니 호수의 가장자리 막 벗어난 지점조차 땅이 쩍쩍 갈라져 있다. 그러니 기타 지역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님과 민중과 하느님이 노래의 문맥에 쓰였을 때 고정된 사전(辭典)적 의미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인용한 시의 제목 ‘십자가’를 기독교에만 가두어 우월해하는 개신교인이나 배척하려는 불교인이 있다면 어리석기는 매한가지이리라. 캄보디아 농촌 논바닥처럼 ‘갈라진 이 세상’, 그걸 어루만질 사랑의 물은 하늘에서도 내리겠지만 깨인 여러분들 가슴에서도 솟길 수 있다./한유일 (교사, shiningday1@naver.com)

 

명을 혁하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