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우리 시대 공안

기사입력 : 2015년 04월 23일

 

숲길국내외를 막론(莫論)하고 혼돈스러운 시절이다.
흔히들 멘토라고 쓰는 단어를 길스승이라 하면 어떨까 제안하는 글을 보았다. 우리 문자가 너무나 쉬워서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국어를 잘 못한다는 생각을 꿈에서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철 안에서 책 읽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세태 속에서 평균 능력의 한국인을 상정(想定)할 때 그가 국어에 능숙(能熟)하다 장담하기 어렵다.

지나치게 표음성(表音性)이 뛰어난 우리 문자를 보면서 차라리 세종대왕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국어사랑 프랑스는 접어두더라도 새로운 개념이 생기거나 외국어가 들어올 때 자신들의 언어로 새 단어 만드느라 애쓰는 지구촌 타국인들 모습이 한국인들에게는 가소로운 모양이다. 해서 안전문이나 겹문이라 해도 충분할 것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스크린 도어’라 부르는 우리들이다.

시대가 혼란스러울수록 삶의 굽이마다 선택은 힘들게 마련이라 길스승을 간절하게 바라는 경우가 잦다. 무수한 갈림길들에서 그러나 속시원하게 우리를 이끌어줄 길스승은 쉽게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 속에서 어렵게 길을 탐색한다.
임제종(臨濟宗)에서 수행자의 정진(精進)을 돕기 위해 사용하는 간결하고 역설적인 문구를 공안(公案)이라고 칭한다. 본디는 중국에서 공무에 대한 문안(文案)이나 공론에 의해 결정된 안건(案件)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한 공적 문건은 매우 공신력이 커서 선사(禪師)들의 지도(指導)에서 사용된 문구들에도 같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리라.

하여 중국에는 1700여 개의 공안이 전해진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글자는 살짝 다르지만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보장하는 경찰을 그들은 공안(公安)이라 부른다. 개인이나 사회나 흔들림 없도록 지켜준다는 점에서 어쩌면 의미가 상통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안이라는 단어보다는 화두(話頭)라는 용어를 널리 쓴다. 신문 기사에서도 ‘요즈음 화두가 되고 있는 무엇’이라는 식으로 많이 등장하여 익숙한 분들도 있을 터이다. 글자 그대로 하자면 ‘화제의 머리’란 뜻으로도 볼 수 있으니 이것이 풀려나간다면 나머지 몸통과 꼬리 또한 그럴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4월의 16일과 19일이 지나는 지점에 서서 여러분들은 오늘 우리나라의 화두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가. 국무총리가 하루 빨리 물러나거나 야당이 정신 차려 국정을 시급히 바로잡아야 하는 게 화급한 화두일까. 아니면 경제가 우선이니 실업 해결인가 그도 아니라면 교육백년대계(敎育百年大計)이니 입시지옥을 파쇄(破碎)해야 할까.
오늘날 우리는 거의 모든 선진국이 민주주의를 하여 발전하게 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세계인의 예상을 30∼40년 가량이나 앞당겨 G2의 지위에 오른 중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공산당 일당독재가 해답이라고 얘기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민주주의가 과연 가장 근사한 답인가를 생각해보자는 안건을 꺼내보는 것이다. 국민(國民)이 주인 되는 체제가 민주주의로, 현재 지구마을에 그보다 더 좋은 정체(政體)가 없다는 덴 동의한다. 그런데 그렇게 주인이 된 국민은 과연 공복(公僕)의 섬김 받아 마땅한 자질을 구비하고 있는가 의심스럽다.

지구의 대세가 된 자본주의에서 개인을 움직이는 합법적 동력은 이기적인 욕망이다. 야기죽거림으로 비칠지 모르나 아무리 뇌꼴스러운 현란(絢爛)한 수식어로 애국이며 애족을 부르대도 소위 사회를 이끈다는 저 위에서 하루 벌어 노숙하는 저 바닥까지 인간들 행동의 면면을 살피면 그것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렇게 나밖에 모르는 개인들을 섬기기만 해 어떻게 공익을 나누는 사회 건설이 가능하겠는가.

욕망의 개인들을 잘 섬길수록 더욱 엇나가는 그러한 현실을 나는 ‘민주주의의 함정’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 표가 아쉬운 정치인들은 때가 되면 국민들에 표를 구걸하기에 바쁘고 그때가 지나면 무시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존중과 섬김을 언급하기에 앞서 국민이란 존재들은 그것을 요구할 자격을 어느 만큼이나 갖추고 있는 것일까.

그 분야 전문 용어를 빌자면 인간이 괴로운 근본 요인은 무명(無明) 때문이다. 무엇이 소중하고 아닌지를 거꾸로 알고 있는 어리석음을 뜻하는 말로 그것이 고통의 삶을 이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와 같은 도착 상태의 사람에게 판단을 맡긴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주인이 되려면 적어도 무명을 깨려는 노력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각성하는 개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각성을 위해 선진 사회들은 공교육에 예산을 투입하는 것이고 고등 종교들은 사랑을 설파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고 전적인 이타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나와 내 가족의 이기만을 도모하는 혈안(血眼)을 명안(明眼)으로 되돌리자는 제언이다. 내 삶의 터전에서 나를 미루어 남의 아픔을 살피고 나의 이익 더불어 남의 몫을 떠올리는 상식을 갖춘 자가 민주(民主)일 수 있다. 이제 그렇다면 여러분의 화두는 무엇인가. 국가의 거시적인 문제점을 외면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의 관심을 여러분 인생 목표와 그에 따른 하루의 일로 공안 삼으신다면 우리 시대 모두의 소망이기도 한 부정부패 없는 세상은 성큼 다가오지 않겠는가 싶다.

캄보디아의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