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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행동하는 사람’ DJ NANA 캄퐁참 소녀에서 캄보디아 대표 인플루언서가 되기까지 가난 속에서 시작한 통역과 라디오, 방송·사회활동·사업으로 이어진 20여 년
“사람들은 타고났다고
하지만, 저는 그저 같은 일을
아주 오래 해왔을 뿐이에요”
캄보디아에서 DJ NANA는 여러 얼굴을 가진 인물이다. 라디오 진행자로 이름을 알렸고 방송과 각종 행사 무대에 섰으며, 소셜미디어에서는 일상과 사회문제를 거리낌 없이 이야기해왔다. 최근에는 사업가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로 활동의 폭을 넓히고 있다.
하지만 뉴스브리핑캄보디아와 마주 앉은 DJ NANA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꺼낸 것은 유명세도, 팔로워 숫자도 아니었다.
“저는 열네 살 때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어요.”
오늘의 DJ NANA를 이해하려면 마이크를 잡기 훨씬 전의 그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했다.
깜퐁참 소녀, 교실 밖에서 더 많이 배우다
DJ NANA는 깜퐁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스스로를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다”고 기억하지만 영어는 달랐다.
영어를 일찍 익힌 덕분에 14살 무렵부터 통역 일을 시작했다. 지방선거 기간 국제기구 관계자들이 지역을 찾으면 주민들과의 대화를 돕는 역할을 맡았고 하루 15달러를 받기도 했다.
“학교를 빠지고 일을 하러 가는 날도 있었어요. 작은 돈이라도 벌 수 있었으니까요. 가정 형편이 정말 어려웠거든요.”
그에게 일은 경험을 쌓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가족의 형편에 보탬이 되기 위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일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배웠다. 방학이면 다른 지역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교육·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스웨덴과 독일, 싱가포르, 미얀마 등 해외를 경험할 기회도 얻었다.
또래와 조금 다른 열여섯 살
그가 성장한 2000년대 초반 캄보디아는 지금과 분위기가 달랐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창업과 인공지능, 기술이 중요한 화두라면 당시에는 비정부기구, 민주주의, 선거, 자원봉사와 같은 이야기가 가까이 있었다.
인권 관련 비정부기구에서 일한 아버지의 영향도 컸다. 사회문제 현장을 접하고 시민사회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민주주의와 선거제도를 자연스럽게 배웠다.
14살부터 이런 경험을 시작한 덕분에 16~17살 무렵에는 보고서를 쓰고 사람들 앞에서 의견을 말하며 해외 참가자들과 소통하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사람들은 제가 원래부터 말을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저는 열네 살 때부터 이런 일을 해왔어요. 오래 했으니까 지금은 자연스러운 거예요.”
특별한 재능이라기보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시작해 오래 반복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가족의 빚,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던 이유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묻자 DJ NANA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꼽았다. 17~18살 무렵 가족에게 큰 빚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그때 제가 ‘알겠어. 내가 맡을게’라고 했어요.”
어린 나이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이후 오랜 시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생활이 이어졌지만 그는 오히려 그 시절 때문에 수많은 일을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출연, 행사 진행, 인터뷰, 통역과 번역, 그리고 훗날 소셜미디어 콘텐츠까지.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여러 일이 결국 지금의 DJ NANA를 만들었다.
라디오 역시 거창한 꿈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라디오에서 한 시간 이야기하면 3달러를 받을 수 있었어요. 저는 그 3달러가 필요했어요.”
라디오가 어떻게 운영되는지도 제대로 몰랐지만 일단 시작했다.
“돈을 받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크든 작든 해봤어요. 할 줄 모르면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페이스북도 틱톡도 없던 20여 년 전 사람들이 처음 그의 목소리를 알게 된 곳이 라디오였다.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라디오 진행자를 자연스럽게 DJ라고 불렀고 사람들이 그를 ‘DJ NANA’라고 부르면서 그대로 이름이 됐다.
대학 시절에도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며 지역·국제 비정부기구에서 일했고, 프리랜서 통역과 행사 진행을 병행했다. 이후 소셜미디어 시대가 열리면서 활동 무대가 온라인으로 확장됐다.
“그때는 ‘인플루언서’나 ‘콘텐츠 크리에이터’라는 말도 없었어요. 그냥 페이스북에서 누군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죠.”
당황스러운 순간일수록 한 발 앞으로
DJ NANA의 경력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일단 해보는 태도’다.
그는 안젤리나 졸리가 연출한 영화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의 앙코르 유적지 특별 행사 진행을 맡았던 경험을 떠올렸다. 국왕과 왕비가 참석하는 자리였지만 왕실 행사를 진행해본 경험이 없었다.
그래도 제안을 받아들였다. 직접 대본을 쓰고 관계자들에게 왕실 표현을 하나씩 확인하며 준비했다.
행사 당일에는 함께 진행하던 파트너가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하면서 영어 진행을 맡았던 DJ NANA가 크메르어 진행까지 이어받아야 했다.
“사람들이 다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 있잖아요. 저는 그럴 때 그냥 부딪히는 편이에요.”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움직이는 것. 그는 오히려 그런 순간에 강했다.
아무리 바빠도 가장 앞에 두는 것은 ‘가족’
DJ NANA에게는 방송인, 통역사, 행사 진행자, 콘텐츠 크리에이터, 사업가 등 수많은 이름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가장 분명하게 우선순위를 둔 것은 가족이었다.
네 남매 중 첫째인 그는 부모와 형제자매들과 지금도 가까이 지낸다. 첫 아이를 임신한 뒤부터 아이가 두 살이 될 때까지는 일을 평소의 30% 수준으로 줄였다.
“아이에게 처음 두 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현재도 어머니와 거의 매일 만나고 시부모와도 일주일에 여러 차례 시간을 보낸다. 가족이 서로 가까운 곳에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역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일부다.
코로나가 바꾼 일상, 그리고 사업가 DJ NANA
코로나19는 그의 삶의 방향을 또 한 번 바꿨다. 행사가 사라지며 방송과 행사 진행이 크게 줄었고, 당시 첫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그에게 새로운 시간이 생겼다.
그 무렵 사업 파트너를 통해 한국 화장품을 접했다. 코로나로 여행업이 멈춘 상황에서 새로운 일을 찾던 파트너와 함께 한국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다.
첫 2년 동안은 클라뷰 한 브랜드만 취급했고 이후 쿤달과 나시픽 등이 추가됐다. 현재는 약 40개 품목을 취급하는 회사를 운영한다.
이제 그의 평범한 하루는 무대보다 사무실에서 시작되는 날이 많다. 두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준 뒤 출근하고, 행사 진행은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경우를 중심으로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사람들과 조금 더 길게 이야기하기 위한 팟캐스트도 시작했다.
돌아보면 그의 여러 활동에는 공통점이 있다.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다시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어린 나에게요?
우리, 결국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고 싶어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지 물었다.
DJ NANA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We made it.”
한국말로 옮기자면 “우리, 결국 여기까지 왔어”라는 말에 가까웠다.
그는 자신의 삶을 특별한 성공담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잘했던 것도, 모든 길을 알고 출발했던 것도 아니다.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했고 눈앞에 주어진 기회를 잡았다. 모르는 일은 부딪혀 배우고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는 자신의 몫을 찾아 움직였다.
그렇게 통역을 했고 라디오를 만났으며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법을 익혔다. 방송과 소셜미디어로 활동이 넓어졌고 이제는 사업가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또 다른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저는 뭐든 너무 많이 갖고 싶지는 않아요. 돈도, 인기도, 명예도요. 충분하면 괜찮아요.”
그래서 그의 “We made it”은 성공을 선언하는 말이라기보다 긴 시간을 잘 버텨온 어린 자신에게 건네는 위로에 가깝다.
“우리, 결국 여기까지 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