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국방부 장관께 – 캄보디아인의 시각으로 본 난민 캠프

기사입력 : 2025년 08월 12일

10_8_2025_zzz7▲태국 국경 난민 캠프에서 아이들이 물을 받기 위해 줄 서 있다.

제 이름은 소 파리나입니다. 저는 크메르루주 시대가 끝나고 태어난 2세대 캄보디아인입니다. 현재 캄보디아 문서센터(DC-Cam)와 Queen Mother 도서관에서 시니어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2025년 8월 4일, 장관께서 발표한 “생존자들에게… 태국이 베푼 모든 것을 잊고 총구를 겨눈 이들”이란 글의 답신을 드리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우선, 첫째로 소명하고 싶은 것은, 캄보디아인들은 크메르루주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학살 시대에 캄보디아-태국 국경의 난민 수용소에서 경험한 일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난민들은 제3국에 배치되거나 당렉 산으로 추방당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우리에게 베풀어진 인류애와 크메르루주를 뒤엎는 데 도움을 준 베트남 참전군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장관께서도, 그 당시 상황에 대한 우리 캄보디아인들의 상황과 국제적 증인들, 미디어 보도 등에도 귀를 기울여 보시길 바랍니다.

둘째로, 베트남 전쟁과 크메르루주 학살을 겪어온 우리 캄보디아 국민은 모두 평화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를 겪은 어른들은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조국이 위험에 처하거나 억압을 당한다면 일어서 지킬 것입니다.

1979년 난민 국제회의에 따르면, 1951년 난민 지위에 관한 협약과 1967년 난민 지위에 관한 의정서를 제대로 수행한 것은 캄보디아와 필리핀뿐이었습니다. 태국을 포함한 여타 아세안 국가들은 동남아시아 난민 수용을 위한 법적 체제와 정책이 미비했고, 그 결과 경제이민자와 국제적 도움이 필요한 난민을 분별할 기준이 없었습니다.

태국은 캄보디아 난민 발생 초기에 난민을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받아들였을 때도 1951년 난민 협약과 1967년 의정서의 기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장관께서는 1979년과 1980년, 당렉 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계시나요? 혹은,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하시나요? 당렉 사태, 당렉 대량학살이라고도 불리는 이 비극적인 사태는 태국-캄보디아 국경 당렉 산 부근에서 벌어졌습니다.

1979년 태국은 캄보디아 난민 수용을 거부하고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태국이 거부한 일부 난민은 다행히 제3국에 정착했지만, 대부분은 당렉 산으로 추방되어 목숨을 잃었습니다.

10_8_2025_photo_2025_08_06_17_02_32소 파리나는 캄보디아 문서센터(DC-Cam)와 Queen Mother 도서관의 시니어 연구원이다.

현 DC-Cam 국장이자 크메르루주 생존자 육 창은 1980년대, 다른 캄보디아인 몇 명과 카오 1 당 난민 캠프에 “불법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들이 “불법으로” 캠프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태국군에 난민 등록비를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태국군의 눈을 피해 빈집에 숨어 교회와 구호단체의 도움으로 생존해나갔습니다.

육 창 국장은 당시에 “불법 난민”들도 학교나 교육 프로그램은 참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난민들을 보살피고 잘 대해준 태국인들도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태국 정부는 난민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육 창 국장은 캠프에서 불법 난민 생활을 이어가다 1985년 미국으로부터 정식 난민 지위를 받아 필리핀 관할 난민 캠프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지금까지도 필리핀에 감사한 마음을 표하곤 합니다.

육 창 국장은 굉장히 운이 좋았던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크메르루주 생존자인 Quach Mengly Education의 창립자 꽉 멩리 박사는 크메르루주 당시 그의 가족과 농 찬 캠프에서 지낸 7일이, 그의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7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가족과 다른 난민들은 태국군에게 모든 것을 뺏기고 버스에 태워져 어딘가로 이송되었습니다.

다른 캠프로 이동하는 줄로만 알았건만, 멩리 박사 가족과 캄보디아 난민 4만 명이 도착한 곳은 당렉 산이었습니다. 당렉 산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과 베트남 참전군을 대항하던 기지였습니다. 당렉 산에 버려진 난민들은 땅 밑의 지뢰를 피해 알아서 생존해야 했습니다. 멩리 박사는 “우리는 지뢰, 총알, 호랑이, 악어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하기 며칠 전 먼저 당렉 산에 도착한 짬족은 대부분 지뢰 폭발로 사망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조엘 브링클리 뉴욕타임즈 기자는 1979년 12월, 당시 “대학살”을 목격한 선교사들을 취재했습니다.

태국 정부는 캄보디아로 돌려보낸 난민들의 등 뒤로 총구를 겨눴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850명이 언덕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고 얼마 안 있어 지뢰가 여기저기서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공포에 빠진 캄보디아 난민들이 다시 언덕 위로 도망치자, 태국군은 이들을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목격한 라스무센 부인은 그날 일에 대해, “세계를 돌아다니며 온갖 일을 경험한 선교사들도, 그 날 일을 언급하면 눈물을 흘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태국군, 지뢰, 어둠에서 도망칠 수 없었던 캄보디아 난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도움을 청하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들의 비명, 지뢰 폭발, 굶주림, 질병으로 메워진 당렉 산은 나중에 “프놈 크마웆” 혹은 “귀신 산”이라는 이명을 얻었습니다.

예일 대학에서 캄보디아 대학살 프로그램을 연구하는 펠로우 연구원 푸앙통 룽사와디삽 박사는 태국은 캄보디아 난민을 수용하는 것이 경제적 부담이었다고 강조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상 당시 난민을 수용한 태국 아란야프라텟 지역은 전에 없던 경제적 호황을 누렸습니다. 많은 태국 농부들은 논을 버려두고 국경 너머의 캄보디아인들과의 거래 사업에 뛰어들었고, 난민들이 늘어나자 모든 부문의 수요가 늘어 지역 경제도 활성화되었습니다. 태국 정부는 국제단체들에서 지원한 난민 구호금으로 이득을 취했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1979년에서 1982년까지, 태국 내에서 소비된 난민 구제금은 약 3억5천만 달러입니다. 이후로도 UN 국경 구호 작전(UNBRO)은 연간 예산의 약 90%인 3천6백만 달러를 태국에 할당했습니다. 난민 사태로 피해를 입은 국경 주민들에게도 보상이 돌아갔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캄보디아에 아낌없는 지원으로 인류애를 보여주고, 태국이 난민을 수용하도록 압박해준 미국과 UNBRO에 캄보디아인들을 대표해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1980년 캄보디아 난민 14만 명을 수용해 준 미국, 캄보디아 난민들을 따뜻하게 품어준 필리핀, 짬족을 받아 준 말레이시아, 크메르루주 정권을 뒤엎는 데 도움을 주고, 난민도 수용해 준 베트남, 그리고 캄보디아를 도운 모든 국가와 기관에 감사를 드립니다.

크메르루주는 당시의 학살을 겪은 생존자 500만 명을 남겼습니다. 올해 캄보디아는 크메르루주 추모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이제, 최근 태국과 캄보디아 사이에 발생한 분쟁에 대해 세계가 무엇이라고 하는지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캄보디아 국민으로서, 우리 캄보디아인은 조국을 보필할 책임이 있습니다. 캄보디아의 군인이라면, 조국의 국경과 땅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2025년 5월 28일, 캄보디아 군인 한 명이 태국군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캄보디아는 분쟁을 일으켰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생명은, 사회-경제 지위나, 나이, 혹은 국적만큼 소중한 것이라는 점을, 부디 기억해 주십시오.

만약, 5월 28일에 희생된 군인이 태국인이었다면, 장관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현재 분쟁이 끝난 지금까지도 캄보디아 군인 18명은 아직 태국 군영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크메르루주 생존자들의 아들들입니다. 그들의 가족과 캄보디아 온 국민이 그들의 귀환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과 정의를 원합니다. 아직 우리는 진실을 보지 못 했고, 정의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캄보디아는 진실과 정의를 가리고자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태국을 초청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사태 악화와 무력 분쟁이었습니다.

캄보디아 국민은 태국만큼 가깝게 지내던 좋은 이웃이 우리의 미래와 발전을 저해하리라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번 사태에 대한 태국의 의도가 무엇이었던, 결과적으로는 캄보디아 국민의 단합을 끌어냈습니다.

본 글은 소 파리나 연구원의 본인의 의견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