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한인 선교사 이야기] 제 10 화 1997년, 캄보디아 내전과 첫 한인 선교사 순직

기사입력 : 2020년 08월 24일

807-1▲ 한인선교사회 신앙 수련회(1996년)

1996년 2월, 7가정의 한인 선교사들은 ‘주캄보디아한국선교사’를 발족한 이후, 각 가정과 사역장을 방문하면서 약 1년 반 정도, 꾸준히 정기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1997년 7월, 훈신펙 (FUNCINPEC)당 배경의 노로돔 라나리드 (Norodom Ranariddh) 제1수상 외유 중에 캄보디아인민당 (CPP: Cambodian People’s Party) 배경의 훈센 (Hun Sen) 제2수상이 훈신펙당 주요 핵심 인사 40여 명을 숙청하고. 당 청사를 공격하는 내전이 시작되었다. 프놈펜은 총을 든 군인과 경찰들로 가득 찼고, 프놈펜에 주재하는 많은 캄보디아인은 상가 문을 닫거나 프놈펜을 떠나 고향으로 피신하였으며, 국제 NGO와 선교단체 사역자들은 캄보디아나호텔과 인터콘티넨탈호텔 등으로 피신하였고, 일부는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내전은 채 1개월 만에 훈센 제2수상의 압승으로 종결되었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캄보디아인들은 프놈펜으로 돌아오고, 닫았던 상가 문을 열었으며, 본국으로 잠시 몸을 피했거나 호텔에 투숙했던 외국인 선교사들도 프놈펜으로 돌아왔다. 1995년 1월, 캄보디아에 입국하여 2년 반 정도, 프놈펜장로교회 개척과 프놈펜성경학교 내에서 ‘카이로프락틱 클리닉’ 사역을 했던 오형석/곽혜진 선교사 가족 역시, 내전을 피해 한국을 방문하여 사역 보고 후, 1997년 9월 3일, 캄보디아에 돌아왔는데, 오 선교사 가족 포함 65명을 태운 베트남에어라인 815편은 프놈펜공항(당시에는 포첸통공항) 착륙하는 과정에서 추락 폭발하였으며, 그 결과 자녀 중엽, 성혁을 포함한 오 선교사 가족 4명은 모두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교민들과 한인선교사회는 함께 시신 수습에 나섰고, 한인 선교사들은 신실한 동역자를 잃은 슬픔에 잠겼다. 다음 날 밤, 오 선교사 소속의 예장합동 총회선교부(국장 강승삼 목사)와 라캄지부(지부장 김수철 선교사) 그리고 KGAM선교부(대표 강대흥 선교사)에서는 프놈펜 공베드로 선교사 댁에서 긴급회의를 가졌으며, 이때 오 선교사를 파송한 부평동부교회(담임 김용택 목사)에서는 중국 선교를 준비하던 김항철/홍정미 선교사에게, 오 선교사 가족의 뒤를 잇기 위해 캄보디아로 선교지 변경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김항철/홍정미 선교사는 하나님과 교회 및 교단선교부의 인도하심에 따라 선교지 변경을 받아들였고, 캄보디아에 온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임을 고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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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오형석 선교사 가족(1997년 9월 순직) 

아울러 부평동부교회는 오 선교사가 세웠던 프놈펜장로교회와 함께, 포첸통센터 부지를 구입하여 “고 오형석 선교사 기념센터”를 포첸통에 세웠으며, 1999년 1월에는 김혜련 선교사를 캄보디아에 파송하여, 프놈펜장로교회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오 선교사 가족이 뿌린 복음의 씨앗은 캄보디아 여러 지역에서 김항철/홍정미 선교사와 김혜련 선교사를 통하여 계속 자라고 있다.

1997년에는 캄보디아에 사는 일본군 위안부 훈 할머니의 소식이 한국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다. 캄보디아는 아시아에서 크메르루주 공산 정권으로 말미암은 아픔이 여전히 회복되지 않아 기도와 사랑 그리고 관심이 필요한 나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캄보디아를 품고 기도하는 교회와 단기 선교사/단기팀 및 장기 선교사 후보생도 많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98년 두 번째 총선 이후, 몇 한인 선교사들은 프놈펜 외의 지방에 거주 또는 사역을 시작하였는데, 김인순 선교사는 바탐봉, 강창윤 선교사는 깜뽕톰, 이성민 선교사는 깜뽓, 조학현 선교사는 쁘레이벵, 이성연 선교사는 뽀삿, 김정룡 선교사는 라타나끼리를 대상으로 하였다./장완익 선교사 (KMAC 역사연구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