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프로비던스

기사입력 : 2016년 0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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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흠, 미국의 동부 명소 세 곳만 추천해 주시겠소!”
누군가 점잖게 이렇게 물어온다면 초행의 초짜 티를 낼 수도 없어 답을 해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이건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견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가볍게 팝콘 맛보듯 읽으시라는 얘기를 에둘러 꺼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대부’를 보신 분은 어린 비토 꼴레오네가 배를 타고 뉴욕 허드슨 강 입구에 도착하며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는 장면을 기억하시리라. 당시 미국은 무한 자유가 허용되는 꿈의 나라로 이민자들에게는 생각되었으니 생명을 위협당하는 처지를 피해 거기 도착한 감회가 어떠했을까. 그래서 이 조각상을 먼저 꼽게 되는데 여기는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미국식의 자유정신을 체험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여신상은 잘 아시는 대로 188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가 선물한 것이다. 무게는 225톤 높이는 받침대를 포함하면 거의 100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건조물인데 프놈펜의 이온몰과 비슷한 넓이의 조그만 섬 리버티에 서 있다. 그러니 자유 찾아 뱃길로 대서양 너머 이 땅을 찾으면 가장 먼저 맞이해 감동을 주곤 했을 터인데 민주주의와 인권을 연상시키는 횃불과 독립선언서를 양손에 들었으니 가히 미국의 한 상징물이라 해서 과언이 아니다.

다음으로는 ‘킹콩’ 영화와 함께 기억되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추천하려 한다. 왠지 모르게 나는 고층의 전망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1972년 세계무역센터에게 자리를 물려주기까지 무려 41년 동안 지구의 최고 높이 건물이었던 이곳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대략 90여편의 영화가 촬영되었다 하는데 지구 위엔 이미 더 높은 건물들이 즐비(櫛比)하지만 아직까지도 뉴욕 마천루의 심장으로 내게는 느껴졌다.
미국이 승승장구하던 1920년대 말 뉴욕은 마천루 건설의 붐이 일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최고층 짓기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무너지지 않는 한 가장 높은 건조물(建造物)을 주문한 결과가 오늘까지도 탄탄히 서 있는 이 빌딩인 것이다.
그러나 공사가 시작된 1930년은 미국 대공황으로 월가가 붕괴되던 때였다. 그리하여 애초 예정 공사비의 절반가량에 1년여 기간 만에 381미터라는 놀랄 만한 높이의 건축물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설계와 가공(可恐)할 속도의 기술이 결합하여 견고하고도 아름다운 외장의 건물로 오랜 동안 세계 최고 높이 건물의 영예를 기록했기에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부강(富强)한 미국 동부의 상징으로 충분한 자격이 있다.

위대함도 자유정신도 훌륭하겠으나 주로 관광지여서 무언가 미흡하시다 싶은 분들에게는 프로비던스를 권해드리고 싶다. 여기는 뉴욕에서 버스를 타고 바닷가를 따라 동으로 3시간 30분여만 달리면 만나게 되는 휴양하기 알맞은 도시인데 초기 독립 13개에 속하는 유서(由緖) 깊은 주의 주도로서 깔끔하고 우아한 맛을 지닌 곳이다. 예서 다시 승용차로 30분 정도를 가면 차분한 전원(田園)인 컴벌랜드가 나타난다.
컴벌랜드는 다른 세 사람과 더불어 생전에 살아있는 부처의 한 분으로 추앙받았던 자랑스런 한국인 숭산 스님의 얼이 스민 곳이기도 하다. 다름 아닌 프로비던스 젠센터가 그곳인데 처음에는 어째서 지역 지명을 딴 컴벌랜드 젠센터가 아닌가 의문이 들었었다. 연유를 알고 보니 초기 포교 단계에서 유명 대학들이 소재하고 있는 프로비던스에서 활동을 시작하였기에 그 출발의 자취가 그리 남은 것이었다.
아시다시피 미국 동부의 대학들은 명문으로 손꼽힌다. 아이비 리그라는 명칭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한데 그러다 보니 그곳 학생들의 스트레스는 상상을 넘어선다. 스님은 그들의 괴로움을 덜어주고자 이 지역에서부터 뜻을 펼치게 되었다.

그런데 설마 나는 종교가 달라서 숭산 스님을 몰라도 좋다고 말하시는 분이 있을까. 우리는 국사를 배우며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만날 때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며 외면하지는 않는다. 민주화에 일정하게 기여한 목사 문익환을 개신교도끼리만 기억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저 신라의 위대한 고승 원효는 프랑스의 불교학자들에게까지 존경을 받는다. 세계화의 시대에 국수주의적 자만에 빠지라는 게 아니라 우리의 조상이라는 점만은 잊지 말자는 것이다. 인류사를 되짚어보건대 앞으로도 상당 기간 민족 정체성의 위상은 견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세 곳 중 어디가 가장 관심 깊었느냐 묻는 것은 헛수고에 속하겠다. 미국 정신을 드날리는 횃불을 든 여신의 웅장한 성스러움도 감동이고 전망 좋아하매 맨하탄 야경을 감상하기 안성맞춤인 마천루도 가슴을 울림은 당연하다. 그러나 영국의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교재에서 세계 4대 생불의 한 사람으로 선정했던 분의 흔적이 ‘평화의 탑’과 함께 남아있는 프로비던스 젠센터야말로 내 마음을 오래도록 흔든 명소임을 말씀드린다. 그 감동을 체험하시기 권하며 방문의 노고(勞苦)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리니 기회가 되시면 다녀가시라. 더욱이 그리 ‘빡세지’ 않은 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면 마음의 평안은 물론 미국 안의 어디에서도 바랄 수 없는 저렴한 값에 숙식을 제공(提供)받는 덤도 얻을 수 있다.

생불로 언급된 네 분 중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 스님은 아직도 생존하고 있다. 현재는 열반하신 또 한 분이 바로 캄보디아 사람인 고사난다 스님이란 걸 여러분은 아시는가. 그리고 이 분은 생전에 숭산 스님과도 친분이 두터웠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고 보니 미국에 앉아 있는 오늘 이 순간 캄보디아가 새삼 가깝게 느껴진다. 한국인인 내가 어쩌다가 캄보디아에서 지내게 되었고 또 시절 인연이 되어 미국의 프로비던스에까지 오게 되었으니 신기하지 않은가. 그러니 그 인연을 보람 있게 나누고 싶기도 한 것이다.
인권이 무시로 침해당한다면 ‘리버티 섬’도 세상 변질을 막을 수 없으리라. 요즈음 한국에선 ‘천사의 섬이 악마의 섬으로 바뀌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그에 대한 주민 인터뷰 내용이 그러한 반응을 불러왔다. 털갈이하는 짐승의 가을 터럭 한 올만큼도 주민들을 변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허나 오늘날 그 섬에 사는 ‘인간의 생각’ 떠나버린 존재들의 비율은 고스란히 대한민국 사회의 비인간성 퍼센트를 반영한다고 생각지는 않는가. 그러니 섬 하나를 매장하거나 또는 남성들 성욕을 싸잡아 문제삼는다 하여 해결될 일이 아니다. 제도적인 개선책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함은 물론이겠다. 그와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들’ 각자가 남녀를 떠나 우리 안에 똬리를 튼 ‘빗나간 남성성’을 반성하여 제거하는 일이다. 그것은 집단을 이루어 거대 신상에게 빌어보거나 드높은 현대적 건물을 짓고 관광하며 인간의 위대함을 선양(宣揚)한다 하여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혼자가 되어 인간 내면에 누구든 갖고 있는 비인간적 성품들의 구성비를 낮추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종교와 상관없이 조용히 엉덩이 붙이고 앉아 내 안의 쓰레기들을 찾아 청소하는 일이 그래서 위대하다. 제3의 추천지야말로 그러기에 딱 알맞은 동부의 새로운 명소(名所)임을 진정 담아 소개드린다./한유일(교사, shiningday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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