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참회합니다

기사입력 : 2016년 02월 18일

권력자 고향의 학교

“네 잘못이 무엇이냐?” 하고 신께서 물으시면, 나는 조금 주저하며 “내 잘못은 인간을 기르지 못한 것이오”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잘못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학생들을 이기적인 동물로 기른 것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잘못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야, 나는 비로소 망설임 털고 소리 내어 “나의 잘못은 대한의 젊은이들을 자기밖에 모르도록 기른 것이오” 대답할 것이다.
먼저 감히 백범 선생님의 명문(名文)을 외람(猥濫)되이 변경 인용함에 송구스럽다. 굳이 이런 무리수를 두는 것은 평생을 바친 신념을 담은 위인들의 글조차도 우리의 오늘은 성적을 위한 읽기로만 사용하는 현실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이 잡문(雜文)은 소위 명문(名門) 고교일수록 그분들의 희생과 노고가 가슴을 울리게 하기보다는 1점의 점수로 환산될 가능성에 오히려 예민하도록 청소년들을 오도(誤導)하며 아프게 ‘응답하는 2016’을 담은 반성문이다.
오늘 나의 글은 그래서 쓰기도 상당히 힘들뿐더러 읽기에도 여러 모로 뻑뻑할지 모르겠다.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로 손꼽히는 학교의 한 곳에서 교직을 시작한 것은 행운이었을까. 당시의 이름난 사립 고등학교들은 S대 입학 숫자로서 평가 받기 일쑤였고 유능한 고3 담임이라면 반에서 반드시 S대 합격자를 배출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거나 때로 예상을 넘은 결과를 얻은 일부 교사들은 목에 힘을 주기도 하였다.

어느 글에서 모스크바 지하철에 노인이 탑승했을 때 청년들이 일어나 자기들 자리에 모셔다 앉히는 장면을 읽는다. 그런 사례를 여러 차례 목격하게 되자 글쓴이는 궁금증이 일어 이유를 알아본다. 러시아 청년들은 대개가 이 전철을 저 노인들이 건설하였으니 청춘을 바친 대가로 그 정도 대접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졌음을 전해 듣는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비슷한 상황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제시한다. 상당한 숫자의 대학생들이 노인들이 건설한 것은 맞지만 월급을 받기 위해 일한 것이므로 과한 양보는 필요하지 않다고 반응한다. 실제로 저자는 전철에서 자신 앞에 앉았던 사람이 일어나 막 앉으려는데 그 옆의 젊은이가 잽싸게 자리를 옮기며 자신 친구를 앉히는 황당한 일을 겪고 당황한다. 양보는커녕 나이 지긋한 분의 확보된 권리조차 양심의 가책 없이 가로챈 셈이다. 그분은 그 씁쓸한 결과를 ‘인간적 만남의 빈약’ 탓으로 진단한다.
모두(冒頭)의 반성을 근거로 도덕성의 가난이라는 위의 현상을 거칠게 짚어보자면 ‘S대 자원의 청소 면제’ 같은 일이 주요 원인일 수 있다. 십 수 년의 사립고 근무 경험에 비춰보면 전부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담임들은 대체로 이른바 명문대에 진학 가능한 아이들을 떠받드는 경향이 강했다. 청소나 잡다한 일을 면하게 해주거나 그것에 소홀할 경우 벌을 받지 않는 예외가 인정되기도 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탄탄대로(坦坦大路)를 따라 쾌속 성장한 그들의 훗날은 어떠할까. 목격자인 나머지 다수는 사회의 공정함을 신뢰할 수 있을까.

인간의 인간다움을 일깨우고자 했던 위의 글을 쓰신 분은 얼마 전 ‘처음처럼’ 오셨던 곳으로 가셨다. 천국이든 극락이든 있다면 그곳에 가셨을 걸 의심치 않으며 나는 앞의 각성을 담은 글 한 편만으로도 그분을 유아처럼 맑은 영혼을 지닌 시대의 길스승이라고 믿는다. 하여 부디 이런 글들만은 스펙이나 점수의 대상이 아닌 상태로 읽히기를 소망한다.
요즘 한국에서는 어린 세대들까지도 ‘1988 쌍문동’을 그리워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국민들 거의가 행복하기로 소문난 부탄 왕국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많다고들 한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가 행복하지 않다는, 그러나 행복한 사회에 살고는 싶어 한다는 증거이리라.
여러 이유를 든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현 상황이 꼬인 데 대한 기성세대의 책임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소수일망정 공부 잘 하는 아이들만 편애한 교사들이 극도의 이기적 몰염치가 상식화한 메마른 한국의 풍속도를 만드는 데 일조한 것 역시 아니라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능한 한 담임을 맡지 않는 것으로서 죄업을 최소화하였지만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으니 방조(傍助)한 죄를 면할 수 없음을 이 글을 통해서나마 드러내어 참회한다.

사정이 이와 같기에 앞 세대를 원망하고 냉소적이 되는 것으로 삶의 에너지를 소진(消盡)하는 젊은 세대를 충분히 이해한다. 하나 그걸로 그쳐서는 지옥 같은 사회가 바뀌기는 곤란하다. 잘못된 어른들에게는 과감히 치받는 것 힘들지만 받아들일 수 있으되 좋은 어른들의 지혜는 눈곱만한 용기와 노력을 짜내서라도 겸허하게 수용하기를 간곡히 권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최소한 위의 노인 예화 글이나 백범 선생님의 글 등은 가슴으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감흥을 더불어 나누는 친구들을 불러모아 냉소(冷笑)보다 온기(溫氣)를 지피려는 청년들을 다수로 만들어야 한다. 기성세대의 잘못은 지적하되 옳은 점들에 대해서는 다가가고 인정하고 배우려는 행동을 누구를 통해서든 습득(習得)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원망을 바탕으로 악담 내뱉고 쾌재를 부르는 일탈(逸脫)의 허망함을 깨닫기를 바란다. 말구유에서 태어난 비참함을 원망 대신 극복 통해 성스러움으로 바꾸신 분의 전범(典範)을 공부하길 바란다. 앞의 일들이 버겁다면 쉽게 배울 수 있는 러시아 지하철 젊은이들 조그만 행동들에서 드러난 ‘인간의 길’을 귀감(龜鑑) 삼기 바란다.

지난주에는 봉사활동 모임을 따라 이 나라 최고 실력자의 고향에 있는 학교에 다녀왔다. 권력자의 행태는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지만 여기는 좀 심하다 싶었다. 캄보디아에서 처음 보는 깔끔함과 세련됨이 곳곳에 배인 교정에서 학생들은 다른 지역에서 흔히 목격되는 그늘 없이 자라고 있었다. 그로 인해 그들이 갖게 될 귀족의식이 나는 자칫 염려되었다. 받은 혜택에 걸맞게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자가 되려 하기보다 출세를 당연시하고 그게 좌절되면 욕만 하는 무리 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아무리 크고 강한 목소리라도 욕과 불평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은, 귀찮아도 행동해야 바꿀 수 있음은 또렷한 진리가 아닐까.
바로 오늘의 시점에서 예를 들자면 캄보디아에 나와 있는 청년들이 가장 분명하게 우선해야 할 일은 부재자 등록하고 투표할 준비를 마치는 일이다. 그런 연후 자기가 가진 경로를 최대한 활용하여 상대적으로 이타적인 사람들에 대해 공부하는 게 다음 할 일이다. 최종적으로는 여러 모임의 자리들에서 분위기에 편승(便乘)하기만 하지 말고 함께 잘 사는 ‘조선천국’을 위해 1분의 용기 내어 자신이 공부한 ‘인간적 만남’ 향한 합리적인 의견을 공유하는 일이다.
설을 앞둔 희망지절(希望之節)에 프놈펜에 앉아 나는 참회하며 새해엔 우리 사회 보다 맑아지길 기원한다. 청년들이 자신들을 이기적인 개인들로만 만든 어른들의 잘못에 복수하는 길은 스스로 ‘양심의 인간’이 되고 그러한 인간을 우리의 대표로 가려내는 투표의 현장에 반드시 가는 것이다. 어렵게 담아낸 진정(眞情)이 전해졌기를 바라면서 거친 글로 거칠게 격정을 쏟아내어 독자들 심란하게 하였다면 그 또한 참회(懺悔)한다. / 한유일(shiningday1@naver.com)
봉사하는 인간들의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