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꼴값합시다

기사입력 : 2015년 09월 10일

뚤꼭으로 향하는 길

무시로 기본이 무너지는 사회는 자연도 감응(感應)치 않는 것일까.
우기의 한복판에 들어서고 있지만 캄보디아는 여전히 덥다. 비가 많이 내리지 않으면서 국민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가슴은 타들어간다. 오늘은 더위에 지치기도 하고 시절도 하 수상하여 가볍고 밝게 쓰고 싶은데 잘 될는지는 알 수 없다.
프놈펜에서 서울을 바라보며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토크빌의 경구를 떠올린다. 그것은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로 번역되어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러니까 ‘아몰랑’의 태도로 정부 욕만 하는 행태는 제 얼굴에 침 뱉기 될 수도 있겠다.

도를 넘는 보수를 표방하며 특정 지역 사람들을 극단으로 혐오하는 유명한 사이트가 있다. 치우침 정도가 지나치면서 상궤(常軌)를 잃게 되어 현실을 비꼬고 조롱하는 청년들이 많기로도 이름이 났다. 벌레라고까지 불리는 그들의 존재는 그러나 그들만의 잘못일까.
일차적으로야 당연히 발언자들 자신의 허물임을 물어 무엇하랴. 그런데 기성세대의 일원으로서 젊은 그들의 인성(人性)이 그 지경까지 이르는데 잘못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사회에서 세대 간 전승은 교육이란 도구(道具)를 통하여 구현되기 때문이다.
폭력의 멍에를 쓰고 교육 현장에서 사랑의 매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렇지만 서당 훈장님이 실력에 앞서 사람을 만들기 위해 들었던 싸리회초리는 전통 사회에서 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보듬어 바른 양식(良識) 지닌 인간으로 만들 어른 세대의 의무로 간주되어 왔다.

허나 우리 사회 일부 어른들이 보이는 행태는 어떠한가. 소수이긴 하지만 어떤 신문들은 그러한 사이트의 패륜을 은근히 부추기는 경악할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좌측으로 기운 사람들에게는 인간 이하의 대접을 해도 괜찮다는 위험스런 사고를 서슴없이 드러낼 때도 있다.
새는 좌우 날개가 있어야 날 수 있다는 책 제목이 있었던가. 오랜 세월 유럽에서 검증하였듯 생각 또한 좌와 우 어디로든 기울 게 마련이라 인간에게 그것은 마땅히 허용되고 있다. 경도된 생각으로 인해 짐승처럼 대우되어도 좋다는 의식만큼 ‘동물스러운’ 생각은 없다.
인터넷을 뒤지다 빨갱이는 고문을 해도 된다는 식의 글을 만날 때 당신의 반응은 어떠한가. 한국에서는 제법 고위층에 속하는 사람들도 그런 식의 발언을 스스럼없이 해대기도 한다. 흉악범 인권마저 매우 높게 보호하는 국가에 기본적인 사상의 자유가 없는 것이다.

참고로 당신의 사상은 어떤가고 묻는다면 나는 스스로를 중도 보수라고 생각한다. 급진적인 혁명을 좋아하지 않고 비록 시간이 걸릴지라도 점진적 개혁과 인간 존중의 교육이 답이라고 믿는다. 그러기에 생각이 다르다고 하여 핍박(逼迫)하고 고문해도 좋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간의 탈’을 썼다면 상대가 밉더라도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하려는 사고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고 지닌 ‘최소한의 인간’ 되기 위한 학습을 나는 인문학 공부라 부른다. 현재의 우리 사회처럼 스펙 쌓기에만 주로 치중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공부가 아니다.
따라서 어떤 사회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선 자신을 돌아보자는 제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칫 잘난 체 한다는 식의 시선을 받을 수도 있겠으나 전혀 그런 의도는 없다. 반성의 그루터기를 딛지 않은 섣부른 주장은 비난의 칼춤으로 상처를 덧내는 경우가 태반을 넘는다.

혐오 담은 속칭 ‘꼴보’나 ‘좌빨’이나 아울러 살아야 할 이웃이다. 행여 자신의 부모가 씨알도 안먹히는 보수라 하여 아버지라 부르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자식들이 급진적 진보라 하여 인연(因緣)을 끊어버릴 것인가.
그러니 최우선으로 필요한 건 상대를 안으려는 포용과 소통의 노력이다. 아니 그게 어렵다면 공통된 점은 무엇인가를 발견하려고 애써야 한다. 같은 민족이라 함은 확대된 아버지들과 자식들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가족끼리 어째서 증오 먼저 내세워야 한단 말인가.
1인당     GDP를 비롯한 경제적 지표가 좋아야 선진국이라 함은 타당한 준거의 하나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부러워하는 유럽의 선진국들은 통합을 위해서도 무척 신경을 쓴다. 핀란드니 노르웨이니 부러워하고 꿈만 꾼다고 거저 되는 것은 아니다.

뛰어난 학자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꼴에 어울리는 게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안다. 그러기에 우리말에 ‘꼴값 떨지 말라’거나 ‘꼴값한다’ 같은 말들이 있는 게다. 우리의 정부 수준은 온전히 현 단계 한국인의 ‘꼴’에 ‘값’한다.
물론 내맘 같지 않은 상황을 만날 때 또는 내 기준에는 인간 같지 않다고 보이는 상대를 눈앞에서 볼 때, 속된 말로 ‘피꺼솟’하여 여러분 손가락이 저 상대방 향해 분노의 화살 되어 날아가려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검지를 제외한 손가락 세 개는 여러분 자신을 향한다는 사실은 어떠한가. 그러니 적어도 나 먼저 세 배 정도 반성한 다음 남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좋겠다.
가볍게 시작한 글이므로 가볍게 정리하자면 선진국이나 이상국은 남 탓으론 이뤄지지 않는다. 그 길은 자신의 책임이 무엇일까를 아프게 돌아보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참다운 공부를 바탕으로 내 안의 어둠을 몰아내는 게 지름길[shortcut] 아닐까 싶다./한유일 (교사, shiningday1@naver.com)

 

프놈펜의 건설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