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工夫1004

기사입력 : 2015년 06월 17일

기부와 나눔
캄보디아에는 KOICA 봉사단원을 중심으로, 정해진 활동 외에 한 달에 한 번 자비를 들여 하는 별도의 봉사활동 모임이 있다. 봉사단원으로서 본래의 활동만으로도 힘에 겨울 일이고 보면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찾기 힘든 경우라 하는데 체육과 바자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지난달의 몬돌끼리 행사에서는 초등학교의 교실 벽 하나를 그림으로 채우는 활동이 있어 모처럼 함께 했는데 문외한인 나는 옆에서 잠깐 거들었음에도 행복한 느낌 밀려들었다.
영어 ‘give’는 우리말 ‘기부’와 공교롭게도 발음도 의미도 꽤 유사하다. ‘기부천사’라 불리는 어느 가수가 생각나게 하는, 아낌없이 준다는 뜻이 서로 통하는 아름다운 단어들이다. 그런데 기부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 생색 전문의 ‘꾼’들이 나서게 되면 일이 엉뚱하게 꼬이기도 한다.
거액의 돈을 선뜻 쾌척(快擲)하는 기부에 더해 그것이 어떻게 쓰이는가를 살피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직접 몸으로 자신 가진 것을 나누거나 단체의 기금 흐름을 감시하는 ‘나눔천사’가 갖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이름만 대면 한국인 누구나 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봉사 나눔 단체에서는 현지인의 동참이 없으면 기존의 시설도 철수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작년 초 몬돌끼리 인근의 라타나끼리에서 활동을 중단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중동 호흡기 증후군’의 위협이 심각한 가운데 그 위난(危難)을 중심 되어 헤쳐 나가야 할 국무총리 인준은 난항(難航)을 겪고 있다. 현 지명자의 인품과 능력을 거론하며 최적의 인물이라 평하는 소리가 있어 정말로 동의하고 싶은 지경이다. 하지만 평시라면 그럴 가능성 있을지 모르나 전시(戰時)에 버금가는 현재에 있어서는 군 경력조차 없는 그가 위기 상황을 잘 다스릴지 선뜻 믿음이 생기질 않는다.
나는 개인의 흠을 잡자는 게 아니며 어떤 개인을 미워하자는 뜻도 전혀 없다. 병역 미필을 문제 삼는 걸 시기나 질투로 본다면 엄청난 오산이며 만일 그런 시각이라면 군에 가지 않는 것이 대단한 능력이나 되는 것처럼 간주하는 일이 된다. 내가 거기 관심 갖는 건 오로지 민족의 위기 상황을 맞았을 때 국민과 함께 할 것이냐 자신 안위를 먼저 챙길 것인가가 바로 군대와 같은 경력들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청문회란 제도는 유사시에 사회를 저버리는 몰지각을 막기 위한 검증이 되어야 한다. 국회라는 일종의 집단 지성에게 우리는 절차에 따라 그러한 일을 위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임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각자 개인이 나서 국가 혈관(血管)의 맑은 흐름을 회복하도록 만드는 게 공부(工夫)의 중요 효용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해방 공간에서 ‘빨갱이’의 누명을 쓰고 스러져간 어떤 인물이 있다. 최근의 연구에선 그가 좌우익을 넘어 민족의 미래를 고민한 지도자라는 조명이 일반화되어 가고 있으며 50여년만에 무죄의 판결도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누명은 아직까지도 보편적 의견으로 우리 사회에 널리 자리 잡고 있음을 우리는 희생자의 입장 되어 섬뜩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남미의 대통령 한 사람은 주체적 노선을 표방하다 뒷배를 보아주는 미국에 얹힌 쿠데타 세력에 포위당한다. 뒷날을 기약하며 피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동지들과 함께 하겠다며 총을 들어 싸우다 산화(散華)한다. 영화로 만들어진 그 장면을 보며 이념을 떠나 리더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가슴 뭉클하게 느꼈었다.
프린스턴 졸업 논문은 지금의 기준으로도 훌륭하다는 어떤 대통령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란을 맞아 한밤중 몰래 철교를 끊어 서민들이 희생되는 참극을 빚는 가운데 국민을 속이며 홀로 피난하였다. 국난(國難) 속에서 도성을 버리고 서둘러 몽진(蒙塵)에 나서 국경까지 줄달음했던 어느 임금과 겹치지만 이제는 다행히 민주의 시대, 그러니 국민의 선택은 어떠해야 하는가며 ‘나들’의 반성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안에는 누구에게나 772와 1004가 함께 산다. 인간다움이란 별게 아니라 ‘칠칠이’의 발현(發顯)을 가능한 한 막고 될 수 있으면 ‘천사’를 드러내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기 위해선 ‘기부천사’도 ‘나눔천사’도 훌륭하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 ‘공부천사’가 되어야 한다.
요즘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여러 단체들이 나서서 인문학 공부의 붐을 이루는 건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마땅히 감당해야 할 학교가 해주지 않는 인간되기 표방(標榜)의 인문학 공부를 돕는 일은 경로야 어떻든 매우 고매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그런 인간의 길 공부까지도 스펙 삼아 하는 땅이라는 말 들었을 땐 실소와 함께 사뭇 심각하게 걱정이 되었다.
우기임에도 비가 오지 않아 견디기 힘든 프놈펜에서까지 어떻게든 모여 인문학 공부의 불을 지피려는 의도는 무엇인가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한국의 일부 흐름들처럼 젊은이들에게 공연한 스펙의 욕구를 부채질하자는 것인가.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그건 다름 아닌 눈 부릅뜨고 내 안의 못난이를 다스려 맑은 정신의 선비로서 이 시대 조국과 세계와 인류에 눈곱만큼이라도 기여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사람 모여 사는 사회의 기본이 무너지는 조국을 바라보며 사뭇 가슴 쓰리다. 들어주기만 한다면 우주를 넘어 어떤 대상에게라도 사태의 안정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 주변 기본을 점검하고 바로잡는 것이 해결의 지름길이다.
나는 대통령을 지지했으니 무조건 그의 말을 옳다고 따르겠다는 건 의리 있는 행동일까. 국민 안전에 대해 심각히 고민한 결과 전격 행동에 나선 서울시장이 바른 것일까. 이런 문제들에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 정보를 정성 들여 찾아 나서는 게 공부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걸음 하나 더 내딛는다면 내가 보는 신문이 보수이든 진보이든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 너와 내가 함께 잘 사는 진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평소 자신이 속했다고 생각하는 집단의 목소리를 벗어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참된 공부란, 목소리 주인공이 서울대나 하버드를 나왔든 명성 짜르르한 운동권 투사든을 막론하고 그것을 내 머리로 소화하려 노력하는 것이며, 그 앎을 바탕으로 나 자신 바른 사람이 되고 그런 사람을 대표로 가려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