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부럽지도 부끄럽지도

기사입력 : 2014년 09월 29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 내려 쿠폰택시를 타려는데 불현듯 대구에 처음 갔을 때가 떠올랐다. ‘서울의 봄’을 맞던 1980년대 초입이었으니 아마도 대구역이었을 게다. 기억되는 역전 첫 풍광은 지금은 사라진 서울 청계천 삼일고가를 방불케 하는 고가도로의 위용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철부지여서 도시화가 곧 발전으로 좋게만 보이던 시절이었다. 그곳이 까마득한 신라시대 이후로 대대손손 권력을 이어온 뿌리 깊은 권세의 땅이어서인 건 더욱 몰랐다. 최근 교민 한 분이 그 방면에 무지한 나에게 대구는 ‘성골(聖骨)들의 땅’임을 귀띔해주었다.
그 때 고가를 보며 받았던 느낌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다시 만났던 것이다. 물론 서울에 머물다 간 길이었다면 그토록 놀라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프놈펜에서 지낸 일 년여 풍상이 그곳 정경을 선진국으로 느끼도록 만들었다는 점을 부인할 필요는 없을 터이다.

그로부터 약 오년 가량 지나서 빛고을 광주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대전 찍고’ 운운 유행가가 아니더라도 동급으로 나열되는 도시들 간에 그리 큰 차이가 있다는 건 충격이었다. 첫인상이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대구와 광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 날 광주의 인상은 이 날 쿠알라품푸르에서 떠올린 오늘의 프놈펜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니 이 도시의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캄보디아인들 눈에 성골의 자태로 비칠 수도 있으리라. 아무 근거 없이 영남인에 무의식으로 주눅들던 호남인의 심정이 그러했을까.
누구 탓을 하자는 게 아니므로 이순(耳順) 즈음 분들이라면 진정으로 객관의 눈 모아 떠올려보시라. 한 때 드라마 속 호협(豪俠)들은 자주 진한 경상도 사투리를 썼었다. 반면 그 집에서 식모로 일하는 처자들이나 선량한 시민들 등쳐먹는 사기한들은 종종 호남 사투리를 씹어뱉곤 했었다. 그러나 살아보시면 아시듯 인간 말종은 지역의 산물 아니라 개인 성향일 뿐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에 의해 조장된 이러한 경향들은 국민 무의식 속에 지역 차별 정서를 깊고 질기게 심었다. 그것을 지구촌에 확대 대입해보면 어떻게 될까.

행복의 새는 마음에 있다고 곧잘 말한다. 하지만 이 멋진 언설이 억압된 타자에 대한 억지춘향의 어설픈 위로 의도로 말해져서는 안 된다. 당사자가 실상에 대한 정확한 앎에 이른 다음에도 그의 입을 통해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해야 옳다. 그러니까 실상을 제대로 알려주는 일이 앞서 이뤄져야만 멋짐이 정당화된다는 말씀이다.
“문맥을 보니 당신도 호남인이군.” 짐작하신다면 이영표 뺨치는 헛다리 짚기이다.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호남인 차별 발언과 행태들이 본능적으로 이상하고 싫었을 뿐이다. 2002년 월드컵 포르투갈전을 수놓은 이영표의 헛다리는 아름답기나 하지만 맹목적 지역 차별의 헛다리는 아둔하기만 하다.
지구 차원에서 미국이나 중국과 비교한 한민족의 근거지는 얼마나 조그마한가. 그 한반도가 남북으로 나뉜 것만도 강대국 논리 때문이어서 얼마나 억울하고 슬픈가. 그런데 또 다시 동서로 나누어 차별과 차등의 발전을 진행시키고 팔도로 나누어 손가락질과 다툼으로 날 새운다면 어떻게나 서럽고 한심한가.

이 지점에서 좀 뜬금없다 싶게 ‘알아야 이긴다’는 격언의 기치를 나는 세운다. 손자의 병법서에는 앎의 대상을 ‘남[彼]과 나[己]’라 분명하게 적었다. 그런데 보통의 우리는 ‘알아야’의 목표를 ‘지피’만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남의 행동이나 잘못은 자연스레 인지되나 나의 그것은 잘 안 보이는 때문이다.
덧붙여 손자는 ‘지피지기’의 순으로 적었지만 내 생각엔 ‘지기’가 먼저여야 한다. 자신 위치가 어딘지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의 위치만으로 목적지 찾을 때의 황당함 겪어본 분이라면 쉽게 인정할 진리이다. 그런데 너무도 뻔한 이 진리를 실생활에서는 쉽게 잊고는 보이는 대로만으로 성급하게 결과를 추구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 알기’가 공부의 주춧돌이고 그 위에 흔들림 없는 자부(自負)의 기둥 세움이 승리와 행복의 전제인 것이다. 그런 ‘지기’의 터전에다 ‘지피’의 집을 세울 때 지지 않는 게임을 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이러매 어떤 의도로든 앎의 눈과 공부의 귀를 막는 것은 그러기에 매우 저열한 방편일 밖에 없다.

흔한 말로 ‘부러우면 지는 거’며 한 마디 보태자면 ‘부끄러워도 지는 거’다. 몇 십 년 따라가야 할 것처럼 보이는 개발된 쿠알라품푸르를 보며 ‘지피’하는 순간 프놈펜 사람들 마음에 부러움의 물결 넘실대는 건 인지상정이다. 상대적으로 꾀죄죄해뵈는 프놈펜이 부끄러운 것도 보통 사람의 정당한 감정이다.
그러나 그 양가(兩價)를 정당하게 파악하여야만 가치의 척도(尺度)는 제대로 기능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하여 오늘 한국을 다시 슬픔으로 적시는 윤일병 가해자들의 천인공노할 극악(極惡)은 가자지구를 피로 물들이는 유대인들의 적반하장인 무도(無道)와 연결된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 기분 만족과 저들 동족의 선민의식이란 ‘지기’의 우물로만 빠져들었다. 남에게도 의식과 슬픔 있고 행복 추구권 있다는 엄연한 인간의 도리를 너무나도 철저히 외면하였다.
‘못난 것도 힘이 된다’는 말 있지만 ‘지피지기’ 선행될 때라야 안분지족이 현명한 주장일 수 있다. 초라한 오늘에 부끄러워 않으며 밝은 내일을 준비하는 자세가 진정한 힘임을 가슴 깊은 곳에서 알게 된다. 선진 도시의 발전상이 놀라워 보이더라도 만에 하나 그 도시가 윤일병 가해자들이나 팔레스타인 공습에 웃음 짓는 유대 근본주의자들의 비인간적 문명 용인하는 야만 공간이라면 일말(一抹)의 부러움조차 가질 필요가 없다. 때 묻지 않은 낙후가 오히려 다행인 프놈펜이 지향해야 할 모델은 그와 같은 추악한 차별의 문명 도시가 아니라 가난할망정 ‘지피지기(知彼知己)’의 공부에 매진(邁進)하는 가슴 너른 인문인들의 수도(首都)여야 한다.

 

한유일(교사) shiningda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