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칼럼] 브라질 월드컵 단상

기사입력 : 2014년 07월 02일

A fan of Brazil holding a mock World Cup trophy cheers during their Confederations Cup final soccer match against Spain at the Estadio Maracana in Rio de Janeiro

캄보디아 거리에서 구걸하던 한 하반신 불구자가 벌떡 일어나는 기적이 있었다. 지나가던 아가씨들이 동전대신 도마뱀을 던져주자 용수철처럼 튕겨서더니 쫓아가 따지기까지 했다. 월드컵 브라질과 멕시코 전에서도 비슷한 기적이 발생했다. 휠체어를 타고 입장한 브라질의 여성 장애인이 경기를 관람하던 중 브라질 팀이 득점하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직 신체장애 여부가 확인이 안 된 상태지만 FIFA에서는 장애인석이 저렴하게 책정돼 장애인을 가장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반해, 혹자는 ‘월드컵의 기적’이 아니겠냐는 의견이다.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어른이라지만, 이 삭막한 세상에 아무나 어깨동무할 수 있고 껴안고 울 수 있는 월드컵 시즌이다. 그냥 기적이라고 믿고 싶은 것일 테다.

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플레이로 국민의 애를 태우는 성적인데도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의 축구에 대한 열정은 유별나다. 하긴 월드컵 인기가 올림픽을 능가한다니 축구사랑은 범세계적인가 보다. 세계가 월드컵에 열광하는 이유로 국가 간 대리전 양상을 꼽기도 하고, 평소 국제무대에서 소외돼오던 약소국이 강대국을 시원하게 무찌르는 데서 찾기도 한다. 뭐니 뭐니 해도 여타의 기록경기와 달리, 개성과 기량이 다른 열한 명의 선수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으로 연출하는 예측불허의 드라마 같은 승부에 있지 않을까. TV 토크쇼에서 “이번 브라질 월드컵 출전선수 중 응원하는 선수는 누구냐?”는 질문에 한 출연자가 “홍명보 선수요”라고 대답하자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순간 ‘왜들 웃지?’ 싶었으니 나도 한물간 사람이다. 차붐을 일으켰던 백넘버 11번 차범근씨는 해설자로, 해외파의 선구자였던 허정무씨는 지도자로,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인공 홍명보씨는 감독으로 변신해, 이번 월드컵 엔트리 중 얼굴과 이름이 매치 되는 선수는 박주영, 기성용 정도다.

나이 탓인지 이제는 승패에 무뎌져 경기장에서 투혼을 발휘하는 선수와 포효하는 관중을 보노라면,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와 사투를 벌였던 글래디에이터와 충격적인 볼거리를 원했던 로마시민의 영상이 겹쳐온다. 작금의 월드스타에게는 부와 명성이 두루 따르니 ‘귀족 글래디에이터’쯤 되려나? 로마의 풍자시인 유베날리스는 “민중이 원하는 것은 단 두 가지, 빵과 원형 경기장의 구경거리뿐이다.”는 말로 권력자가 제공하는 빵과 오락에 빠져 정치에 방관한 세태가 로마멸망으로 이어졌다며 로마민중을 꼬집었지만, 검투사의 투기대회를 통해 권력에 대한 불만을 해소한 덕에 오히려 쇠망시기가 늦춰지지 않았나 싶다. 요즘은 옛날과 달리 대중이 의식화되어 다원적인 성격을 띤다. 자국승리에 집착하는 훌리건도 저마다의 응원문화로 자리매김 하는 추세고, 모든 경기를 관전하며 축구자체를 즐기는 마니아도 늘고, 빈민구제예산으로 치루는 축제라 하여 월드컵에 반대하는 축도 상당하다. 돼지방광에 바람을 넣어 만든 것에서 2014년 월드컵 공인구 브라주카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발달한 축구공처럼 인간도 조금씩 진보하는 모양이다. / 나순 (건축사, http://blog.naver.com/na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