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칼럼] 우산장수 소금장수

기사입력 : 2012년 11월 07일

프놈펜에 살면서 생긴 잠버릇으로 우리부부는 초저녁에 잠들었다가 한밤중에 깨, 두어 시간 쉬었다(?) 다시 자곤 한다.”통잠도 한때”라시던 옛 어른들 말씀대로 인생이 저물어 간다는 증거이리라. 얼마 전, 하필 그 골아떨어진 초저녁에 하자민원 전화가 걸려왔다.(우리부부는”하자”소리만 들어도 심장박동이 빨라진다.”하자보수”를 달가워할 건축쟁이는 없을 테니까) 건축에’기역’자도 모르는 아들 녀석이 부모가 깰 새라 혼자서 일을 수습하려는 해프닝을 벌였다. 그 과정을 지켜본 지인께서”착한 아들”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아들이 어려서는 더 착했다. 녀석의 용돈은 먼저 본 친구가 임자였고 배식 차례를 양보하다 반찬차지를 못하는 때도 있었다. 녀석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이다. 객관식시험에서 항목을 고르지 않고 공란으로 낸 문제가 많아 점수를 엉망으로 받아왔다. 정답을 몰라 고를 수 없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엄마가 너무나 어이없어하자”모르는 걸 어떻게 아는 척 할 수 있지?”하며 의아해했다. 이제 막 교육에 입문한 순진한 아이에게,”연필을 굴려 아무 답이라도 찍어야지!”요행수부터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한 동안 지켜 본 적이 있다.
 
우리아이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고 걱정하는 엄마들이 대부분이다. 착한 성품이 강점이 될 수 없는 세상이라는 반증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보호해 주어야 할 것은, 젊고도 활기차며, 순수하면서도 부드러운 마음이라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곱게 나아가기가 힘들고, 쉽게 다수파로 흘러가 버리기 때문이네.> 괴테 또한 순수한 것이 혼탁해지는 일은 순간임을 염려했다. 바람직한 사회란 속임수를 쓰지 않는 사람과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보장받는 사회라고 누구나 믿고 있지만, 자기 자식에 대한 생각에 이르면 영악한 패거리가 지배하는 풍진세상의 살풍경이 겹쳐오기 마련이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노라면 선악의 논리에 따라 순행할 때보다 힘과 협잡에 휘둘리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누구나 어려서는 그렇지만, 나에게도 눈곱만한 거짓에도 천벌을 받을까 무서워 잠 못 이루던 놀라울 정도로 착한 시절이 있었다. 갈등의 세월을 거쳐 오다보니 그런 마음은 넝마가 돼버렸지만. 세상이란 양과 질, 지성과 감성, 관조와 역동 등 대립하는 것들의 조합인지라 갈등의 조율과정이 곧 삶이었으니. 공사장 소음에 이웃들은 질색 하실 테지만, 우리 건축쟁이들은 뿌듯해한다. 비가 오면 소금장수 아들 걱정, 날이 맑으면 우산장수 아들 걱정에 평생 영일이 없다는 어머니의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남의 자식, 남의 처지 또한 절실함을 헤아리는 관용의 실천이 곧 내 자식과 나 자신을 보호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더구나 인간의 미덕이 잘 보존되는 사회라야 비전을 기대할 수 있는 법,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각계의 입장을 수렴하여 제도화함으로써 갈등의 소지를 줄여나갔으면 좋겠다. / 나순 (건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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