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한인 선교사 이야기] 마지막 화 캄보디아 선교의 기둥, 주캄한인선교사회(KMAC) 24년

기사입력 : 2021년 01월 18일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구름 기둥·불 기둥으로 인도하셨다(출 13:21). 그 하나님께서는 1,700만 명 캄보디아인 선교를 위해 1993년부터, 한국 교회 파송의 선교사를 사용하고 계시는데, 이는 약 3,000명 추산의 캄보디아에서 사역하는 외국인 선교사를 국적 기준으로 살펴볼 때, 단연 가장 많은 수에 해당하며, 기둥 같은 책무를 갖고 있다.

827-1▲ 주캄보디아 한인선교사회 로고

주캄보디아한인선교사회(KMAC: The Korean Missionary Association in Cambodia)는 1993년 1월 10일, 입국한  강창윤/지주옥 선교사를 포함한 11명의 선교사가, 1996년 2월 17일, 이성민/김창숙 선교사 댁에서 발기총회를 가짐으로 시작되었으며, 2002년까지를 초창기로 볼 수 있다. 1996년 9월, 주캄보디아 대한민국대사관이 프놈펜에 세워졌고, 1997-1999년에는 캄보디아 감리교신학교-감리교연합선교부(교단)가 시작되었다.

1997년 9월 3일에 오형석/곽혜진 선교사 자녀 2명 가족이 순직함으로 킬링필드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요 12:24)이 되었으며, 1999년 12월 1-2일, 프놈펜에서 열린 ‘새천년전도집회’에 많은 한인 선교사가 참석하면서 캄보디아 개신교계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선교사회에서는 1996년 4월과 1997년 10월의 수련회 포함, 월례회를 각 회원 사역장 순회하면서 가졌고, 서병도, 김한주, 송진섭, 김철환, 김항철, 강창윤, 고 이병관(2003년에 순직), 김정호 선교사 등이 선교사회 회장으로 섬겼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를 도약기로 볼 수 있는데, 선교사회 성격이 친교 중심의 ‘선교사회’에서 사역 협력 중심의 ‘선교사협의회’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50유닛 이하였던 회원이 급속히 증가하였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선교사회 안에 ‘윤리위원회’가 세워졌다.

2003-2004년, 캄보디아장로교공의회(교단)-장로교신학교가 시작되었고, 2003년, 인도차이나 캄보디아대회가 시엠립에서 열렸으며, 2005년, 캄보디아국립기술대학교(NPIC)가 세워졌다. 이 기간, 황 신, 공베드로, 문찬식, 김병교 선교사 등이 선교사회 회장으로 섬겼다.

2007년부터 2013년까지를 성장기로 볼 수 있는데, 선교사회가 사역 협력중심의 ‘선교사협의회’에서 친교 중심으로 ‘선교사회’로 다시 변경되었으며, 이는 지금까지 지속되어오고 있다. 다만, 영문으로는 Fellowship이 아닌 Association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개인 간 친교를 기반으로 하되, 사역 협력을 위한 최소한의 정체성은 유지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2007년에 캄보디아선교공동체(MAC)가, 2010년에 헤브론의료원이 세워졌으며, 선교사 회원 수는 계속 증가하였다. 지방에 주재하면서 사역하는 선교사가 늘어났으며, 프놈펜포럼을 비롯한 각종 연합사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2013년 5월 28-31일, 프놈펜 기독교연합봉사관에서는 ‘캄보디아 개신교 90주년 선교포럼’을 가지면서 ‘캄보디아 선교역사’ 단행본을 출판하였으며, 이 기간, 최원찬, 오태근, 김정룡, 노진태, 박창기, 이성연, 백의성 선교사 등이 회장으로 섬겼다.

827-2▲ 주캄보디아 한인선교사회 2020년 1월 정기회(프놈펜제일교회)

2014년부터 금년까지를 성숙기로 볼 수 있는데, 캄보디아에 입국하는 한인 선교사 증가세는 다소 감소하였지만 그래도 꾸준히 입국·가입하여 선교사회 회원은 700명 이상, 캄보디아 정부의 외국인 등록과 강화된 비자 제도 등으로 선교사회는 EFC 단체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시엠립, 시아누크빌과 동부지역에 지부를 세웠으며, MK위원회/장학위원회/이단대책위원회/공원묘지관리위원회와 사역지원분과/예배찬양분과/IT미디어분과/대외협력분과/역사연구분과 등이 활동하였고, 구현서, 김성섭, 이근희, 최도연, 정진영, 장인혁 선교사 등이 회장으로 섬겼다./장완익 선교사(KMAC 역사연구분과장)